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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책을 읽기는 읽는건데, 이런 식으로 읽는다고 생각해봐. 책을 읽기 전에 작두 같은 걸로 제본된 부분을 잘라내는거야. 그러면 책이 종이 수백 장으로 흩어지겠지? 그 종이를 화투 섞듯이 섞은 다음에, 아무렇게나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거야. 막 남녀 주인공이 책 시작할 때에는 서로 사귀는 것처럼 나오다가 갑자기 이야기가 뚝 끊기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아직 만나기도 전이고, 남자 주인공이 중간에 죽고,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여자의 과거가 나오고, 그런 식인 거야.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p.18)
남자가 제안했던 저 책 읽기 방식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저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면 바로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이 소설은 저 남자가 말한대로 시간의 흐름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어떤 패턴대로, 하지만 절묘하게 세 인물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길지도 않은 소설인데 한참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책을 놓지 못했다.
지금도 1분, 1분 순차적으로 흐르는 이 시간을,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이 당연함을 의심하게 하는 것.
읽는 나는 혼란스럽지만 작가는 담담한 것 같았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한쪽 방향으로 체험하지. 그 속도를 조절하지도 못하고. 아주 드라마틱해. 모든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 단 한 번씩만 경험하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리석기도 해. 왜 인간들만 그런 식으로 시간을 체험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떤 진화상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p.11)
#현재.
지금 이 시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생경하게 느껴진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이 남자만은 지금 오롯이 이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간여행자와 역사도둑> 작가는 매일밤 수백년 전의 일들로 머리를 쥐어뜯을 것이고
어떤 작가는 앞 선 트렌드를 읽기 위해 돈이 흐르는 곳을 봐야 한다며 지금도 어느 가로수길의 카페에 앉아 있을 지 모른다.
영훈이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순간부터 그 과거에 매여 있고
여자는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말 한 마디로 친구의 일생이 바뀌었다는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사람들은 과거라는 시간에 얽매이기도, 혹은 앞으로 일어날 지 모를 일에 대비하면서 지금 현재를 목적 아닌 수단으로 흘려보내곤 한다.
우리집 개를 보면서 가끔 느낀건데 시간에 연연하는 건 인간 뿐이다.
시간이 우리를 어쩔 수 없이 어리석게 만드는 걸까? 우리가 시간을 어리석지 않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쨌든 우주알이라는 건 없다. 정말 매력적인 녀석이긴 하지만 우린 시간을 지금 우리가 써왔던 대로 그렇게 흘려보내며 살아가야 한다.
시작과 끝을 정해놓고 순서대로...
시간을 의심하는 사람은 심지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조차 힘들 것이다.
이 남자...
사랑하는 여자를 오랫동안 볼 수 없고
자신으로 인해 파괴되는 인생을 봐야만 했던 이 남자를 우주알이라는 게 조금은 구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보통 인간이었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못 볼 꼴만 보여주곤 이별 했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삶이고 변하지 않을 패턴이다.
그가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했건 어쨌건.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p.87)
함께 행복했던 시간이 많았으면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시간이 좋게 끝날지, 안 좋게 끝날지를 알 수 없으므로 매 순간에 충실 할 수밖에 없다.
그걸 미리 알 수 있다면 나와 좋게 끝날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관계를 맺겠지만 그게 과연 인간에게 좋은 일일까?
남몰래 굿판을 구경시켜줬던 남자든, 이 우주알을 품게 된 남자든
그 능력이 인간세상에서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큰보람의 이야기는 흘려듣는 듯 하다가, 남이 이혼했다는 소리는 더 듣고 싶어하는 여자의 심리.
영훈 어머니의 민폐에 가까운 스토킹? 과 폭력적으로 빼앗긴 모성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없으므로 곧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꽃을 따라 꿀을 따러 다니는 이동 양봉업자와 미용 봉사를 하러 다닐 영훈 어머니
마포의 옛일들 ..
하나하나 곱씹어 보다가 이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
자신의 아내가 첫 번째 독자라는 , 아내가 불러서 가야 한다고 말하는-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것 같은 한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