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옥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봤다.
그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이 책은 몇몇 등장인물이 겹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단편소설들이지만 장편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간빙기의 밤> 속 주인공이 제대하고 한 여자와 헤어지기 전 침대에 누워 군대에서 저 <먼 산에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있다... 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은
그 주인공의 뒷 얘기를 다른 단편을 통해 보는 것 같은 경험.
이 소설들을 읽다보면 자꾸 과거를 끄집어내게 된다.
그 땐 별 것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별 것이 되는 순간들...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기억들이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도 조금은 혼란스러울 만큼 두서없이 그의 기억이 나타난다.
그리고 문득, 서글퍼진다.
기억이 끝나면 그곳에 있던 그녀도, 그것도, 그 시간도 끝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감촉할 때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존재할 때 나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감촉하지 못한다. (해설/ p,332)
그러니까 삶이란 기억을 통해 비로소 완벽해지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든, 그 기억이 희미해졌든...
내가 두려웠던 건 끝을 보는 거였다. 그녀가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하는 거였다.
내게는 그냥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적당했다.
그냥 내가 싫어졌을 뿐이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없어야 했다.
사랑이 시작되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끝나는 데도 이유가 없다.
그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곳에서 결정되는 일이어야 했다. (p.76 )
즉, 어떤 일들은 그전에 일어난 일의 결과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일은, 어떤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무언가 일어나기 위해선,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p.78)
방학식은 좀 심오했다.
낡은 소파, 탐구생활, 엄마가 만들어놓았을 법한 생선조림과 밑반찬들...
방학식을 해서 집에 일찍 온 날, 집에 아무도 없는 게 괜히 좋아서 들뜬 소년에게 찾아온 한 여자. 나도 처음엔 교회에서 나온 아줌마인가? 했지만...
여자는 문득 죽음을 암시하며 이 소년을 집 밖으로 끌어내려하지만 소년은 꽤나 격렬하게 싸운다.
세상과 자아에 대한 모순 속에서 문득 모든 것이 완벽한- 굳이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누군가가 책임져주겠다고 하는 그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고
그곳으로 데려가주겠다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면 따라갈 것인가?
거긴 언젠가 내가 혼자서 가야만 하는 곳이긴 하다.
외로울 거라고도 생각이 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고 싶어할 만큼...
작가는 왠지 순순히 따라가지 말고 싸우라고 얘기하는 듯 했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
친숙하고 익숙한 분위기에서 몽환적이고 어쩌면 판타지 같은 세계로 넘어가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여운이 오래 남고 <크리스마스 포커> 에서처럼 삶과 죽음에 대해 가볍게든, 무겁게든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러 작품들이 다 매력 있었지만 내 마음속 명작은 이 < 방학식> 이다. 단편소설의 매력이 200% 발휘되었다고 생각된다.
# 그러니까 영화로 치자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어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남자 선배와 대낮부터 술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그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그런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담백함과 소소함 속에서도 빛나는 진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잘 들어줄 것 같았고 ,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얘기해줄 것 같았다. 또 나를 잘 기억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다섯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소설집이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