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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ㅣ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기 전부터 너무 많은 좋은 평들을 들었기 때문일까, 큰 기대에 부풀어 읽었으나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그렉 이건의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인간 의식의 원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흔히 '선호도'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행복한 이유」의 주인공처럼,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을 입으며 신경 물질이 더 이상 분비되지 않게 되며 아예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존재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의뇌를 이식받으며 다른 수천 명의 취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취향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묘사는 우리의 선호도가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닌, 단지 뇌 속에서 분비되는 물질로 구성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택'할 수 있음에 고통받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그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을 수도 있다. '인간은 모두 나와 같은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가기 마련이다. 반쯤 보편적인 동시에 반쯤 특수하며, 가차 없는 자연도태에 의해 반쯤 예리해지고, 우연이라는 자유에 의해 반쯤 누그러진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내 경우는 그런 과정의 세부를 조금 더 적나라하게 의식해야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p.138)'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우리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되는 법 배우기」에서 등장하는 <보석>으로의 <전화> 역시 마찬가지다. 유기뇌와 <교사>를 통해 유기뇌와 유사하게 되도록 학습한 <보석>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주인공은 그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 수술을 계속해서 미룬다. 그러다가 <교사>의 고장으로 그는 자신이 유기뇌에서 비롯된 자신이 아니라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사>가 고장나면서 유기뇌와 <보석>의 동기화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보석)는 <전환>을 통해 결국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주인공이 말하는 것처럼 '애당초 '나'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2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되어 있는 마당에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p.256)'
「100광년 일기」의 경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래에서 온 일기를 바탕으로 '미래는 언제나 결정되어 있었다. 개개인의 유일무이하며 복잡한 유전 형질과 과거의 경험은 차치하더라도, 그 밖의 어떤 것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인간이 그 이상의 어떤 '자유'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인간의 '선택'이 인과관계에 절대적으로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이 그 결과를 정하는 것일까?(p.55)' 주인공은 미래에서 온 일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것이 잘못됐음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미래의 일기에 맞춰 생활하고 똑같은 일기를 작성하는 일을 멈춘다. '불변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한 가지 확신하고 있는 일이 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줄곧 미래를 결정해 왔고, 앞으로도 줄곧 결정할 과정의 일부라는 점이다. 내게 그보다 큰 자유는 없다. 그보다 큰 책임도.(p.71)'라는 문장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설령 미래를 안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미래가 내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이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든다고 이해해도 되는 걸까? 작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보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이나 선택이 자발적으로 발생하는가, 혹은 그저 정해진 매커니즘의 발현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루미너스」다. 초기 우주에서 발생한 수학적 <결점>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 <결점>을 기점으로 다른 수학 체제를 사용하는 구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IA(대기업)가 그것을 이용해 불합리한 일을 저지를 위험이 있어 주인공들은 <결점>을 이용해 상대편 수학 세계를 완전히 함락시킴으로써 그 마수를 저지하려 한다. 그러던 중 '저쪽 수학'을 사용하는 존재들이 주인공들에게 잠시나마 자신들의 산법을 이해시킴으로써 주인공들은 IA가 그들을 활용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이 단편은 인간 존재에 관한 의문을 던지지는 않으나, 수학을 이용해 우리가 볼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렇게 수학을 주제로 한 SF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단단한 과학논리를 바탕으로 구축된 그렉 이건의 세계는 내 기대와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웠다. 내 취향과는 별개였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 SF 취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하드SF가 아닌 인간 그 자체, 우리의 일상과 유사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하드SF는 거의 처음 접해보는 거라 매우 새로웠다. 어렵지만, 자연히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흥미가 생겼다.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