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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제40회 일본 아카데미 13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분노>는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했다. <퍼레이드>, <악인>, <요노스케 이야기> 등도 영화화되어 일본 문학계의 대표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 문학 특유의 아기자기함을 갖추면서도 인간심리의 복잡한 양상과 윤리적 문제를 거시적으로 다루어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도쿄 근교 세 커플이 겪는 불안과 갈등의 선택이 미래의 사회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신간 <다리를 건너다> (은행나무, 2017)도 비슷한 맥락을 이어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챕터 제목이 계절로 되어있음)이 순환의 관계를 이루듯, 개인의 용인과 침묵의 선택이 향후 미래사회를 결정하다는 주제의식이 묵직하다. 전조(前兆)와 인과의 짜임도 촘촘하고 기발하여, 이야기로서의 재미도 크다.
현실 사건과 소설 이야기를 접목시키는 대목이 흥미롭다. 한국의 세월호 참사와 도쿄 도의회 성희롱 야유사건, 홍콩의 우산혁명 소요와 팔레스타인 소녀 말랄라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소설 속 인물 간 개인적 불륜, 부정의 에피소드에 병행된다. 사회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체로 의로운 인물들이 미술계 거목의 입김에 침묵하고 남편의 뇌물 수수를 용인하고 연인의 외도를 끔찍한 방식으로 응징한다. 사회 불의에는 민감하지만 개인 불의에는 관대한 부조리한 정의 잣대를 소설은 꼬집고 있다. 주부 야스코가 남편의 비리는 외면한 채, 시사지가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행동, 홍콩의 민주화운동에 열광하는 다큐멘터리 PD 겐이치로가 연인의 사랑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고등학생들의 이른 성생활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불륜은 자연스럽게 여기는 아키라의 태도도 그렇다.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491쪽)는 소설 속 대사는 몰염치와 불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경종의 메시지를 던진다. 소설 말미 그려지는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책임이 있는 암울한 결말이다. AI(인조인간)의 개발 폐해와 연결하여 더욱 부조리하고 무감각한 세계를 그려낸다.
소설은 나비효과의 책임을 나비에게 물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나비가 아닌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임을 깨닫게 한다. 이로서 미래의 경고는 희망으로 다시 그려진다. 힘든 여건에서도 불의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인물을 찾아내면서 과거 우리의 행동에 각성을 촉구한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고, 바꿀 것은 지금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가 다시 돌아온 현실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에 묻혔지만 못지않은 재미와 의미를 주는 작품이다. 세포에서 정자와 난자를 추출하여 배양한 인조인간 ‘사인’이야기에서 판타지적인 흥미도 찾을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들로 가득하지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변명하고 연연하기보다 과감히 다리를 건너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함께 꼭 잡을 손과 거부할 손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그것에 달려있다.
발췌
사람이 없는 넓은 공간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휑하다기보다는 시간 비슷한 것이 그곳에 있는 느낌이다. 다양한 시간들이 허둥지둥 비를 피해 뛰어든 듯한, 조용한데도 부산스러운 분위기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67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가 잘못됐다고 알아챈 순간, 그걸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못되지 않은 게 될까, 어떻게 하면 자기가 옳은 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104
해를 거듭해가면 주위에 죽음이 늘어간다. 죽음이 적은 동안은 불의의 죽임이고, 그것이 많아지면 ‘뜻밖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 ‘불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죽음은 불의지만, 만 명의 불의의 죽음은 없다고 친다면, 불의의 반대말은 ‘계획적’이나 ‘당연한’이라는 말이 되는 걸까. 123
맞은편 방에 묵었던 남자들의 알몸은 경찰의 개입을 받고, 전에 그런 남자들 같은 사람은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했던 히로키는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다니, 이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일인가 199
아이들은 우리 시청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거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깨닫는다. 282
어느 쪽이든 가볍다. 너무나 가벼워서 구역질이 났다. 535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아무리 자기 마음을 속이려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거니까.” 543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 솔직한 생각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