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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 반비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서로 다른 선이 세 개 있다. 이 선은 각자의 시간대 속에서 똑바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교차되어 있다. 서로 만날 일 없고 단절되어 있는 것 같은 평행한 시간대는 이따금 한 지점에서 수렴한다. 지난 해 12월 부고하신 古 서경식 선생의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에는 세 가지 시간축이 중심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두 친형의 구명 활동을 호소하고자 처음 미국에 갔던 1980년대, 도널드 트럼프가 인기를 얻어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었던 2016년, 그리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원고를 집필한 2020년대 코로나 팬데믹 시기다.
1980년대에 아직 20대였던 선생은 어릴 적부터 반동 기질이 강했다고 고백한다. 군부 독재는 이미 '박종철'이라는 희생자를 만들었고, 얼마든지 또다른 '박종철'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저자의 두 형 역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가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출소를 바라봐야 했다. 차디찬 감옥에 있는 두 형, 그리고 홀로 일본에 남겨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선생은 여러 인권 단체를 전전하며 이 부당한 일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런 사명감과 동시에 선생의 마음에는 뭔지 모를 갑갑함이 있었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 디아스포라가 머나먼 미국에서도 쉬이 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정체 모를 억눌림을 풀어준 것은 예술이었다. 틈이 나는 대로 미국에 있는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공연장에서 문화 예술을 향유하던 그는 언제나처럼 감상과 깊은 사색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두 번째 시간축인 2016년쯤 미국을 다시 찾은 선생의 감정은 사뭇 다르다. 나이를 생각하면 언제 또 다시 미국을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를, 아니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정세가 이맘때쯤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브렉시트, 트럼프, 홍콩, 미얀마, 우크라이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각자도생이란 혼란 속에 빠진 세계는 선생을 더욱 옥죄는 듯했다. 그리고 코로나. '연대'라는 인간 사회의 기능을 크게 단절하던 이 무서운 질병은 그를 더 깊은 사색으로 밀어넣었다. 다만 이렇게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디에고 리베라, 벤 샨, 파블로 피카소, 로라 포이트러스 같은 예술가들에게 받은 영감으로 아직 희망을 놓칠 순 없다고, 놓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온갖 부정과 악덕이 세상을 떠돌게 되었지만, 그래도 상자 맨 안 쪽에는 희망이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 선생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고인이 된 그를, 고인이 남긴 글을 반추해본다. 얼핏 파편 같은 기억memory로 남을 단상은 사유라는 실을 타고 한 줄로 엮이면서 회고recollection이 되었다. 그가 남긴 글을,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가다 보면 미노타우르스를 처치하고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져본다.
덧1) 서로 다른 세 시간대가 교차한 서술 덕분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가 생각났다.
덧2) 이번 미국편 외에도 저자의 또다른 인문 기행인 영국과 이탈리아를 읽어봐야겠다. 공교롭게 둘 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책에서 중심이 된 세 가지 시간대처럼, 책도 3권이 되어버렸다. 더 많은 인문 기행을 더이상 만날 수 없어서 안타깝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