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 치고 - 살아온 자잘한 흔적
박주영 지음 / 모로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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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문에는 뭔가를 부연 설명하는 형태의 (괄호)를 잘 쓰지 않는다. 의미 전달에 있어 속도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판결문의 특성 때문이다. 판결문장은 단호하고 적나라한 의사 표현 방식이다. 나 역시 판결로 국기기관으로서 공적 의사를 수없이 드러냈다. 앞선 두 권의 책조차 대부분 괄호 밖 나의 모습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외부로 드러난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괄호 치고) 살아온 삶이 있다.] - 책 표지에, 그리고 본문 9쪽에


  지방법원 부장판사라고 해서 꼭 법정이나 재판에 관한 글만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택한 생업은, 그 사람에 관해 많은 걸 알려주지만, 전부를 알려주진 않는다. 이 책이 업무일지처럼 어떤 사건과 거기에서 비롯된 자기 생각을 담은 거라면 난 이 책을 이해하려 하지 쉽게 공감하려 하진 못했을 것이다. 재밌게 본 영화, 드라마, 자꾸 생각나는 음악, 즐겨 찾는 게임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고위 공직자나 국기기관이 아니라,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자연인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보고 나선 나도 모르게 작중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쳇 베이커의 대표곡 <Everything Happens to Me>를 흥얼거리곤 한다. 책에서 내가 요즘 관심 가지는 아티스트를 언급하며 재즈란 장르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즉흥성, 그리고 이를 인생으로 엮어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여운이 되었다.


  [(...) 인생도 비슷한 테마의 무한 변주임과 동시에 무수한 카덴차나 즉흥연주다. 주어진 악보대로 사는 인생은 없다. 타인의 삶이나 연주를 따라 해도 표절이라 욕할 수는 없지만, 별 재미는 없다. 비록 성취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변주가 고유하고 독창적일수록 인생은 아름답고 의미 있다.] - 68쪽


  [재즈는 마이너리티와 소수의 음악이다. 아니, 경계의 음악이다. 주류의 언저리에 있지만 주류로 편입하지 못한 자, 경계에 선 사람의 비애를 모르고서는 재즈를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경계인만이 알 수 있는 인식과 감정, 음감과 리듬이 있다.] - 152쪽


  애정하는 대상 외에도 판사라는 직업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치열함, 괴로움, 복잡함 같은 온갖 감정도 눈에 띈다.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쓴 글이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 속에 있는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말을 할지, 어떤 글을 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작가이자 편집자다. 판결문에서 괄호를 쓰지 않는 것처럼 저자 역시 하고 싶지만 전하지 못한 수많은 말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책에 실린 본문에도 정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괄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괄호라는 형식을 떠나 행간에, 여백에 녹아 있는 타인의 생각을 음미하는 건, 몇 번이고 곱씹는 건 참 의미 있고, 때로는 꼭 필요한 일이다.



*. 모로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고 남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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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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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릭시르 출판사에서 모집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정주행 멤버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남자는 다시 접이의자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저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남자는 꼼짝 않고 앉아서, 사방에서 도시가 깨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도시는 내키지 않는 듯 우물쭈물 깨어났다. - p.20 ] 


  "스타벅스에서 한 남자를 봤는데 폰도 없고 태블릿도 없고 노트북도 없고 그냥 거기 앉아서 커피나 홀짝이고 있었다. 싸이코패스처럼. I saw a guy at Starbucks today. No iPhone. No tablet. No laptop. He just sat there. Drinking coffee. Like a psychopath." 당연히 우스개소리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밈이다. 인터넷에서 재미로 본 밈이 1967년에 출간된 소설, 그것도 범죄 소설에서, 용의자의 시점으로 접하게 되니 퍽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했던 서평 2건에 이어지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와 〈오펜하이머〉에서 서로 다른 세 시점과 시간대를 능수능란하게 엮어 이야기를 진행시킨 걸 연상시킨다. 앞서 언급한 용의자가 발코니에서 사건을 관찰하는 시점, 무차별 강도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시점, 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시점. 세 톱니바퀴가 맞물리면서 처음에는 작고 한적한 공원에서 이따금씩 일어났던 무차별 강도 사건은 어느새 어린이들이 실종되고, 성폭행당한 후, 살해되는 사건까지 이어진다. 강도와 성폭행/살인 사건은 별개인가? 그저 우연히 맞물린 건가? 아니면 동일범이 일으킨 소행인가? 형사 마르틴 베크는 전작에서 보여준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꼼꼼히 수사를 진행한다. 


  단순히 강력 범죄를 수사하고 이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만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 군상과 고뇌를 보여준다. 예컨대 피해자 가족에게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달해야할지 갈등하는 경찰, 절망에 빠진 유가족을 배려하는 장면 등이 눈에 띈다.  사건이 해결되더라도 결국 남은 이들은 하루하루를 다시 살아가야 한다. 끔찍한 일도 이겨냐내야 한다. 작가 부부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건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범죄가 해결될 수 있는지 과정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 후에도 또다른 하루를 감내하며 살아나가야 할 남은 이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쨌든 일제 검거는 예정되어 있었고,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11시쯤 작전이 개시되자 범죄자들의 은신처와 마약 소굴로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도둑, 장물아비, 포주, 창녀는 다들 납작 숨었고, 중독자들마저 대부분 그랬다. 불시 단속은 시간이 흘러도 처음의 기세를 잃지 않고 줄곧 강경하게 진행되었다. 경찰은 도둑 하나를 현장에서 검거했고, 자기 보존 본능이 부족했던지 지하로 숨지 않은 장물아비 하나를 잡았다. 경찰은 사회의 찌꺼기 구성원들을 휘저어놓는 데 성공한 것뿐이었다. 노숙자, 알코올의존자, 마약중독자, 모든 희망을 다 잃은 사람들, 자기들의 복지국가가 돌멩이를 일일이 들추듯 뒤지는데도 기어서 도망칠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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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3 세트 - 전3권 -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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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도 고와서 책장에 꽂아만둬도 흐뭇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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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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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독일인들은 2차 대전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어서 생각해볼 지점이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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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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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라진 동독의 일상을 접할 수 있어서 정말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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