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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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오랜 표현은, 문학이 텍스트를 넘어 현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에 관해 마오쩌둥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나 맥아더의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람들은 최신 무기의 위력을 보지 못한 작자들이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는 있다. 다만 19세기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가 남긴 작품이 21세기 한국에서 새로이 번역되는 이유는 잘 쓰여진 글이 다른 시공간 속에 사는 이들에게 분명 어떤 식으로든 울림을 주는 까닭 때문일 거다.


  괴테, 실러와 더불어 19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하이네는 으레 '낭만주의'라는 사조가 뒤따른다. 독문학입문과 독일문학사를 배운지 한참 지난 희미한 내 기억 속에서도 하이네는 낭만주의풍으로 대표 시집 『노래의 책(Buch der Lieder, 1827)』과 『독일, 어느 겨울 동화(Deutschland. Ein Wintermärchen, 1844)』를 남긴 작가다. 하지만 하이네가 낭만주의에 빠졌던 건 아주 한 때의 일이다. 하이네는 작가라면 응당 작품 속 세계에 빠지거나 거기로 도피하지 않고, 산적해있는 현실 속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에 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생몰년을 보자. 19세기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온 유럽을 뒤덮었고,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이 모든 이념 변화를 그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했던 빈 회의와 체제,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찬동과 반동 속에서 7월 혁명과 2월 혁명으로 아주 숨 가쁘게 흘러갔다.  그 후 하이네의 조국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최대한 억압하며 득세했다. 강성해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치고 독일 연방에서 주도권을 거머쥐었고, 한껏 달아오른 민족주의를 발판 삼아 독일 통일을 이룩했다. 


  프랑스 혁명이 잉태한 자유주의는 하이네에게 막대한 영향을 심어주었다. 반면 조국 프로이센은 하이네가 보기에 아직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북해로 떠나 일련의 그림(단순히 그림 하나Bild가 아니라 복수형인 Bilder) 같은 시를 남긴 이유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응어리진 마음을 저 넓고 푸른 바다를 보며 풀고자 한 개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북해는 잔잔하고 따스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다. 시시각각 기상이 변하고 높은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북해는 혼란이 극에 달했던 당시 유럽 정세를 닮아있다. 


  인문주의자 괴테는 르네상스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에 비해 하이네가 여행한 북해라는 공간은 자연, 아니 야생 그 자체다. 낭만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연을 이상향으로 보았지만 그가 여행한 북해는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하이네가 젊은 날에 쓴 「북해(Nordsee)」연작, 즉 이 책의 제1부(Erste Abteilung, 1825)와  제2부(Zweite -, 1826)에 실린 시들은 행이 구분되는 운문이지만, 제3부(Dritte -, 1826)에서는 산문시로 변화한 형식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념 - 르그랑의 책(Ideen - Das Buch Le Grand, 1826)』인데 정제된 시 언어를 벗어나 하이네의 생각이 날것 그대로 적혀있다.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다양한 형식을 녹여냈다는 건 그만큼 하이네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현실 문제에 천착했고, 북해라는 공간에서 단순한 경험 이상의 체험을 했기 떄문일 거라 짐작해본다.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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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정원
샌드라 로렌스 지음, 김지영 옮김 / 엣눈북스(atnoonbooks)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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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가 더 큰 책이라 참 매력적입다!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단 느낌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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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일기 : 열두 달의 빛깔 - 열두 달의 빛깔
허윤희 지음 / 궁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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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이 변하는 모습을 포착하는 건 얼마나 섬세한 시선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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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수업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공부와 그의 시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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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철학의 정수가 담긴 <명상록>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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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 일상을 파고든 마약의 모든 것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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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분명 마약 관련 범죄에서 자유로운 이른바 '마약 청정국'이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는 건 총기는 물론 마약이 시중에 거의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연예계를 중심으로 마약 소식이 계속 보도됐다. 일부 연예인 뿐만 아니라 특정 클럽 같은 장소를 중심으로 일반인도 쉽게 마약을 구할 수 있단 보도가 이어졌다. 미국은 원래 마약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문제인 국가고, 네덜란드는 타 국가에 비해 마약에 관대해 의료용으로 지정된 마약이 많고, 중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특유의 엄벌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마약 관련 범죄에는 조금도 자비를 보이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한국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원래 마약이 일상적이지 않은 나라였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마약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마약을 하며 왜 끊지 못하는 걸까?"란 질문에는 1부 '마약 하는 사람'을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의 저자 양성관 선생님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전공의 경험을 바탕으로 1부에는 마약에 중독된 온갖 환자 유형이 등장한다. 별다른 마취제가 없었을 때 외과 수술은 환자에게 질병보다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20세기부터 등장한 온갖 약물 덕분에 환자들은 편안한 상태로 수술 받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이런 약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단 점이다. 천국 같은 경험으로 시작된 마약 투여는 이내 중독이 되고 지옥이란 결말에서 끝이 나는 법이다. 마약을 시작, 중독,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아스피린, 타이레놀 같은 일상 약물부터 코데인, 트라마돌, 그리고 모르핀, 펜타닐 같은 여러 약물의 특징과 작용 메커니즘 같은 정보를 알 수 있다.


  2부 '마약 파는 사회'는 "국내에 그리고 전 세계에 왜 마약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걸까"에 대한 답이다. 1부는 개인 차원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면 2부에서는 이를 사회,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다. 마약은 고부가가치 사업 중 최고다. 커피와 코카인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와 마약왕 에스코바르에 관한 정보, 북한에서 국가적으로 벌이는 마약 재배, 그리고 옥시콘틴, 헤로인, 펜타닐을 중심으로 떼돈을 번 미국 제약 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장에서는 한국의 상황이 이어진다. 온 도시가 마약에 찌들어버린 미국 렉싱턴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한국도 점점 마약에 중독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모를 일이다.


  국내외 뉴스를 통해 마약에 관한 보도는 이따금씩 접했지만 이 책은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집필해서 마약 그 자체에 대한 정보가 풍성했다. 뉴스로만 접하면 그저 '마약'으로 불리는 약물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보다는 마약으로 인한 범죄와 사회에 미치는 여파만 알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약학에 대한 정보는 물론 의사가 환자를 상대하며 개인이 왜 마약에 빠지는지, 마약에 빠지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같은 개인 차원의 문제를 너머 사회나 국가, 그리고 세계 같은 더 큰 공동체 단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마약에 관해서라면 예외가 있어선 안되겠다. 마약으로 인한 쾌락은 한순간이지만 고통은 영원하니 말이다.



*. 히포크라테스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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