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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의 색상 명명법 - 현대 색상 표준 체계를 세운 세계 최초의 색 명명집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패트릭 사임 지음, 안희정 옮김 / 더숲 / 202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 김춘수, 〈꽃〉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말인즉슨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를 말해준다는 뜻이다. 인간의 시각은 아주 미세한 색상 차이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하지만 정작 그 세세한 차이를 구분하는 이름이 따로 없다면 그 능력은 빛이 바랜다. 뉴턴이나 괴테 같은 학자들은 광학과 색채론에 천착해 자연에 존재하는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밝혀냈다. 자연의 대상이 인간에게 익숙해지려면 개별 대상 혹은 현상을 일컫는 이름이 필요하다. 베르너는 독일의 저명한 지질학자 겸 광물학자다. 그는 광물과 암석 분류법의 초석을 다져 근대 지질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는 본업인 지질학과 광물학을 벗어나 다른 분야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에 존재하는, 우리가 인식하는 색을 부르는 방법응ㄹ 확립한 게 베르너다.
18-19세기 과학은 유럽에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런 변화의 물결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도량형 통일과 단위 제정이다. 전류, 온도, 압력, 힘, 일, 주파수, 방사선 등을 측정하기 위한 단위가 이를 연구한 학자의 이름을 따서 기준으로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색에도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럽 사람들은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같은 공간을 탐험하며 다른 식생과 환경에 대한 견문을 크게 넓혔다. 유럽에서 자생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색이 다른 동식물이 보인다. 아예 처음 마주하는 생물도 있다. 땅과 바다에서 보이는 광물들은? 색상은 이제껏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했지만 사람마다 특정 색을 다르게 느끼고 이를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혼동을 막을 수 없다.
이에 베르너는 현대 색상 표준 체계를 세운 세계 최초의 색 명명집을 발간했다. 그러나 온전히 베르너 혼자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자연사학자 로버트 제임슨(Robert Jameson, 1774~1854)dhk 화가 겸 미술교사 패트릭 사임이 이 분류 체계를 더 가다듬었다. 아 책은 곧 색의 이름, 색에 대한 묘사, 실제 색표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물과 식물을 참조한 자료도 포함되어 더욱 다채로웠다. 아마 베르너의 작업이 없었다면 훔볼트나 다윈 같은 후학들이 남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연구 성과를 정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베르너의 작업물은 모든 사물과 대상을 분류하고자 하는 유럽의 지적 전통,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했던 사고방식이 폭발적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가던 근대 과학의 탐구 정신과 결합해 이뤄진 하나의 기준점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는 뉴턴의 격언처럼, 우리는 베르너가 구축해놓은 시신경과 인지 감각에 여전히 크게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덧1) 이토록 큰 업적을 이룩했음에도 인지도가 낮은 베르너……. 본문에서도 언급한 훔볼트가 떠올라 못내 아쉽다.
덧2)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로 '누르스름하다' '벌겋다' 같은 다양한 색채 표현을 외국어로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책에 실린 색채 분류 한 페이지만 봐도 그런 말은 쏙 들어가게 될 거다.
덧3) 이제야 팬톤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컬러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덧4) 책 띠지를 항상 버리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띠지처럼 보이는 색상 팔레트는 사실 표지에 인쇄된 것이다.
*. 더숲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