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주년 광복절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하루 후에 관람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린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지만, 격동적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극이기도 했다.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흘러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 독일 과학자들은 우라늄 원소에 중성자를 때려주면 핵분열을 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이를 응용해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게 상식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태동한 이후 과학은 전례없는 속도로 진보했다. 원자폭탄 개발도 전례없는 속도로 추진되었다. 나치 독일보다 어떻게든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여 전쟁에서 주도권과 억제력을 지녀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의견에 미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945년 7월 트리니티 실험 결과 미국은 원자폭탄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4월에 자살했고, 독일 역시 5월에 항복하여 유럽 전선은 마무리됐다. 독일에 투하될 예정이었던 핵무기는 결국 일본을 겨냥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떨어졌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패전국으로 전락한 두 추축국, 독일과 일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어 이념 대립의 상징이 되었고, 일본은 운좋게 분할되진 않았다. 왜 독일은 분단됐는데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을까?
피에르 랭베르 기자가 쓴 '모건도 계획'에 관한 글(p.44~49)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1944년 9월 15일, 캐나다에서 있었던 제2차 퀘벡 회담에선 패전 후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의견이 있었다. 헨리 모건도는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그는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킨 독일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아예 농경과 목축 국가로 전락시키자고 강변했다. 군수 산업을 해체하고, 중화학 공업을 제거 혹은 파괴하여 독일을 무장 해제하고,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걸 골자로 하는 계획이다.
유대인이었던 모건도는 악랄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와 독일이란 나라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에게 독일은 그렇게 되어도 좋은 나라였다. 하지만 이 강경한 계획에는 반대하는 이도 많았으며, 이견은 미국 내에서 나왔다.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코델 헐 국무장관은 모건도 계획을 전후 청산이 아니라 또다른 학살이자 문명 파괴로 바라봤다. 나치의 등장과 발흥에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처사가 있었고, 모건도 계획은 여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터였다. 결국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모건도 계획은 원안과 크게 달라졌고, 4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후에는 폐기됐다.
1944년 아르덴 대공세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나치의 패망은 그때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그리고 동부 전선에서 소련을 동시에 맞상대할 수 없었다. 일본 역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엔 무리였다. 빠르든 늦든 간에 두 추축국은 곧 패전국이 될 참이었다. 처칠은 나치 독일과 대항한 소련의 뒤통수를 칠 '언씽커블 작전'까지 세웠지만, 명분도 없는 이 전쟁이 또다른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너무나 컸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 덕분에 미국이 계획한 '몰락 작전' 역시 시행되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계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맞선 냉전으로 재편되었다. 패전국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다. 역시 패전국인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다. 대신 남북으로 쪼개진 건 35년 동안 일제 치하 식민지로 갖은 수모를 겪었던 한반도였다.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 한 나라의 운명도 어느 과학자의 삶만큼이나 기구하게 흘러갔다. 1945년 여름이었다.
덧1) 공격적 현실주의자로 명망 높은 정치학자 미어샤이머가 쓴 글(p.7~13)과 프랑스판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가 쓴 글(p.14~17)은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취했던 유화적인 태도가 아니었다면 미국이 지금같은 위기에 직면하지 않았을 거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글에선 우크라이나 지원을 놓고 미국이 처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있다.
덧2) 축알못이라 FC 바르셀로나 관련 글(p.73~79)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엘 클라시코가 왜 그리 관심을 모으는지, 카탈루냐의 대표 도시 바르셀로나와 카스티야의 대표 도시 마드리드 간 라이벌 구도를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카탈루냐는 북부 바스크 지방과 더불어 스페인에서 가장 독립 요구가 높은 지역이다.
*. 르몽드코리아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잡지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