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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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위에 올려진 과일 바구니. 그 속에 든 사과, 배, 포도처럼 형형색색인 과일. 그 옆에 있는 잔. 보통 잔에는 물이 채워져 있지만, 와인이 담겨있을 때도 있다. 테이블 너머엔 창문과 벽난로가 있고, 촛대와 각종 장신구도 곳곳에 있다. 우리가 '정물화'를 연상할 때 머릿속에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 책이 서문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정물화가 회화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유럽 근대 무렵부터였다. 오랫동안 이어졌던 중세 시대에서 그림은 곧 성경 내용을 옮기고 쉽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 시기에선 비로소 신을 넘어 인간이 더 주목받게 되었다. 신체적으로 열등해 다른 동물들과 생존 경쟁에서 불리했던 인간이 이토록 번성할 수 있었던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인간이 발명한 갖가지 도구 덕분이다. 문명의 발달은 곧 도구의 발명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

 

  초상화는 인간을 직접 그려 대상, 즉 존재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런데 정물화에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그림에서 배제한 풍경화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드러낸다면 정물화는 조금 성격이 다른 듯하다. 정물화가 부각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쓰는 일상 생활 속 도구와 공간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그림 속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유추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물건에 관심을 갖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며, 이처럼 '간접적'인 수단으로 범벅이 된 정물화를 읽어내는 데엔 맥락을 알 필요가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기독교의 오랜 금언은 오랫동안 유럽 사람의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을 지배했다. 재산을 축적하고 더 많은 물건을 탐하는 건 경건하고 독실한 신앙 생활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기피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 금욕을 강조하던 가톨릭의 폐단 때문에 개신교가 새로 유행했다. 온 유럽을 전란에 휘말리게 한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유럽에는 이제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게 됐다. 그 후 유럽에서 주도권을 잡은 건 네덜란드와 영국 같은 알프스 이북의 나라였다. 이 두 나라는 대항해시대로 가장 큰 이득을 보기도 했다. 종교의 안정, 과학의 발달, 그리고 세계관의 확장 같은 이유 덕택에 유럽에는 갖가지 도구가 수입, 발명되었다.


  유럽의 지식 세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나 오스트리아 빈 같은 도시였다. 문학, 철학, 예술, 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모여 교류하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다루는 예술사를 독해하다 보면 인명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부여잡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 경우엔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얇고 작은 책에다가 중간에는 도판도 많지만 온갖 참고문헌과 인용, 그리고 인명이 등장해 독서 중에 헤맨 적이 꽤 있었다. 첫 장에서 밝히듯 이 책이 서술하는 내용은 정물화 속 오브제처럼 어지러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혼돈chaos 속에 질서cosmos가 있듯,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가 생명과 죽음, 힌두 신화에서 시바가 파괴와 창조라는 상반되는 개념을 함께 관장하듯, 적은 텍스트 안에 이토록 방대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건 참 오묘하다. 



덧) 읽는 내내 나의 배경지식이 많이 부족하단 걸 느끼게 해준 책이다... 셜록 홈즈와 포의 고딕 소설을 중심으로 토르소와 두상에 관한 2장이 많이 어려웠고, 사과와 배라는 상반된 기의를 중심으로 한 정물화 해석이 이어진 3장은 퍽 흥미로웠다.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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