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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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Emil Cioran, 1911~1995)은 비관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였다. 그가 낸 시집을 보면 『태어났음의 불편함』,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절망의 끝에서』, 『내 생일날의 고독』,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사르트르가 남긴 말처럼 우리는 인생에서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본인이 태어나는 걸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올 수는 없다. 이처럼 삶은 우연한 선택에 따른 결과이며,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인생 속에서 우리는 온갖 부정적인 경험을 마주해야 한다. 삶이 고달프고 괴로운 건 이런 이유 탓이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말이 있다. 영화계에서 유독 평론가들이 선호하는 감독이 있듯 문학계에서도 일반 독자층보다는 같은 작가 사이에서 유독 더 알려진 이도 있을 것이다. 판단 기준이 지극히 자의적이지만(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에밀 시오랑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에밀 시오랑은 분명 작가들의 작가가 아닐까 싶다. 염세주의로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시오랑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반출생주의자다.

우리는 태어난다, 우연히. 시오랑은 이를 몹시 비판적으로 여겼다. 태어나는 건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지만 죽음에는 그나마 선택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태여 자살이란 방법을 택하진 않았다. 그리고 84세까지 장수했다. 결혼, 출생, 가족은 사회 체계이자 생물학적 현상이다. 시오랑은 이처럼 지극히 당연한 현상과 제도를 부정했다. 인생에서 겪은 결함과 시련을 대물림해선 안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에밀 시오랑은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대표적인 반출생주의자이기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과정을 고르진 않았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우연히 주어진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갔던 이유는 뭘까?

다시 사르트르로 돌아가보자. 그가 말한대로 인생은 분명 끊임없이 무언가를 고르는 것이다. 태어나는 건 우연이다. 그렇지만 그 한 지점, 그 순간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선택을 내린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선택을 하는 기회는 우연히 올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자기 몫이며 그 결과가 또다른 선택지로 갈라진다. 태어난다는 건 우연이고 그만큼 수동적이다. 반면 우리그 온갖 선택으로 둘러쌓인 삶을 이어가는 건 우연히 태어난 결과에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이 책은 많은 글을 엮었다. 그 많은 글 중에서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가 표제작이 된 건 이 글이 우리의 인생이란 선택과 과정을 그만큼 잘 함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태어나고 죽는 건 순간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삶은 연속이다. 명사처럼 멈춰있는 게 아니라 동사처럼 나아가는 과정이기에, ‘인생’보다는 ‘살아간다’는 말이 나는 왠지 더 마음에 든다(『인생』으로 번역된 중국 작가 위화의 대표작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목적지없이 배회하고, 경험하며, 이해하는 존재인 플라뇌르flâneur는 장석주 작가처럼 어느 한 활동에 갇혀 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하고, 해석하고, 이를 표현하는 이에게 적확한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를 쓴 시기는 청량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다가 그때 떠오른 단상을 동네 단골 카페에서 정리했을 때라고 한다. 연일 비가 이어지는 꿉꿉한 장마철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그런 풍경이 더 머릿속에 남는다.


*. 현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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