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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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살 '크리스티네'는 너무나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 클라인-라이플링의 우체국에서 근무하지만 별다른 업무는 없다. 한가함을 넘어 무료한 업무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강성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과 함께 제국의 영광도 빛이 바랬다. 하지만 나라가 패망했어도 여전히 남겨진 이들이 있다.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크리스티네는 하나뿐인 오빠와 아버지마저 잃었다. 그리고 혼자서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를 부양해야만 한다.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발랄한 시기 아닌가? 애석하게도 크리스티네에겐 그런 행복과 여유가 없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청춘은 아무 쓸모가 없다. 


  권태로운 일상을 힘겹게 감내해야 했던 크리스티네의 인생에 어느 날 불현듯 균열이 생겼다. 오래 전 미국으로 떠난 이모가 크리스티네에게 보낸 전보가 우체국으로 도착한다. 타국에서 상류층이 된 이모가 스위스 휴양지에서 보낸 전보에는 조카를 그곳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자신 이외엔 직원이 없는 우체국을 비워두어야 하는지, 본 적도 없는 이모를 찾아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크리스티네는 고민한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고생밖에 모르고 메말라 바스러지는 게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이런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딸에게 강권한다. 어머니의 성화에 떠밀려 크리스티네는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좁디 좁은 공간을 떠난다.



[‘좋아, 아주 좋아.‘ 거울 속 여자가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여자는 황급히 복도를 뛰어가 이모의 방으로 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니 시원한 실크 드레스의 촉감이 더욱 산뜻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실려 떠가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가볍게 날아갈 듯 움직여본 것은 어린 시절뿐이었다. 드디어 여자는 변신에 도취하기 시작했다. - p.95]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는 길은 마냥 황홀하고 즐겁다. 하지만 고급 휴양지 엥가딘에선 모든 것이 화려하고 빛이 난다. 반면 크리스티네는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다. 이모가 준 옷과 화장으로 크리스티네는 들뜬 기분을 느낀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크리스티네를 향해 사교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자신의 이름이 잘못 알려진 것도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다.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다. 이 순간만큼은 크리스티네, 아니 '폰 볼렌' 양은 어엿한 상류층 여인이다. 하지만 이런 황홀경은 역시 한순간에 그칠 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도취에 찬물을 끼얹은 건 뭇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였다. 온갖 추문은 물론 크리스티네가 사실은 하류층이란 게 밝혀지면 조카는 물론 이모에게도 치명적이다. 그렇게 원치 않는 휴가를 시작했던 크리스테는 마찬가지로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열흘 만에 휴가를 끝내야 했다.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다시 돌아온 오스트리아의 클라인-라이플링에서 보내야 하는 삶은 이제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변한다. 한 번 생긴 인생의 균열은 더 큰 파급으로 이어진다.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향락을 경험한 크리스티네에게 이제 이런 시골 생활은 맞지 않는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이런 크리스티네와 마음이 맞는 건 전쟁이 끝나고 귀향길에 손가락을 다친 '페르디난트' 뿐이다.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뭔가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세상을 향한 절망이다. 더이상 기댈 곳 하나 없는 이들은 인생을 뒤엎을 계획을 꾸민다. 극심하게 대조되는 양극화, 나아질 기미가 없는 비참한 인생, 가까운 사람들의 부재 속에서 이들이 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서글프지만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고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소설의 결말을,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을 피해 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아메리카로 가서 브라질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츠바이크의 인생을 따라가면, 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거 같다. 주로 단편과 중편 소설을 발표하며 평소에 집필도 굉장히 빠르게 했던 츠바이크가 왜 끝내 이 소설을 죽는 순간까지 발표하지 않았을까? 아마 오랫동안 집필해오던 이 소설을 츠바이크는 자기 인생과 동일시했던 건 아니었을까? 온갖 역사적 인물의 평전을 쓰고, 소설에서도 등장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표현한 츠바이크조차도 끝끝내 자기 인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인생은 쉼없이 흘러가기에 글로 표현하기엔 찰나와 같은 순간을 놓치기 쉽다. 츠바이크는 자기가 겪은 경험을 이 소설에서 크리스티네란 인물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고, 아마 소설에서만큼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야기를 열린 채로 남겨놓은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 빛소굴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 이벤트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이 책은『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이숲에올빼미, 2011)』의 판권이 만료되어 새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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