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이로운 지구의 생명들
데이비드 애튼버러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3년 5월
평점 :
중학생 때였다.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가 보라고 추천해준 게 있었다. 드라마도,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웬 다큐멘터리였다. 처음엔 뭐 이런 걸 보나 싶었는데 보고 있자니 입이 떡 벌어졌다. 지구는 이렇게 아름다운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고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스레 알게 됐다. 그 다큐멘터리는 BBC의 <살아있는 지구 Planet Earth>였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쭉 훑어가며 광활한 대자연과 온갖 동식물을 보여주니 없던 관심이 생겼다. 그 후로 나도 시간 나는대로 나머지 편을 찾아봤다. 그리고 같은 방송사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바다 The Blue Planet>, <생명의 대여정 Life>도 나중에 찾아봤다. 미국식 영어만이 영어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내가 처음으로 꾸준히 접했던 영국 매체였다. 내가 본 BBC 다큐멘터리에는 언제나 정감 넘치는 목소리가 함께 했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David Attenborough였다.
인간은 환경에 정말 크게 영향을 받는 생물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인류는 대부분 북반구 중위도에 살고 있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고, 강수량과 기온이 적절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는 곳에 따라 인간은 건물과 의복을 알맞게 발명했지만 다른 동식물처럼 신체를 크게 바꾸진 못했다. 오늘날 지구에 남아있는 인간은 결국 모두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종이라서다. 하지만 동물과 식물은 다르다.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극한 환경에서도 살고 있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다. 같은 종이라도 서식지에 따라 모습이 크게 다르며 아예 다른 종으로 분화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화산이 폭발하면 주변에 모든 것이 황폐해진다. 하지만 인도 신화에서 시바라는 신이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관장하는 것처럼, 화산은 생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화산에서 여정을 시작한다(1장). 지구 상에서 가장 추운 극지방과 고산지대는 화산과 너무 다른 환경이지만 여전히 생물이 존재한다(2장). 체온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식물을 부각한다. 북쪽 숲(3장)과 밀림(4장), 그리고 풀의 세계(5장)에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식물이 어떻게 잎을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수분을 관리하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농사를 위해 풀을 태우지만 풀은 아주 강한 생존력을 지녀 언제든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게 참 경이롭다.
왕성하게 자라는 풀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곳이 바로 사막이다(6장). 일교차가 극심하고 모든 생명 활동에 필수인 물도 부족한 곳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도 생물은 수분을 지키고 열을 발산하는 식으로 살고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기도 하고(7장), 인류 문명 발상지의 필수 조건인 강, 즉 민물에서 어떤 생물이 사는지도 보여준다(8장). 강은 흘러 바다와 접하는데, 민물과 짠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염분을 배출하는 생물도 많다(9장). 강이 흘러가는 바다는 너무도 거대해 우리가 사는 대륙과 섬을 멀리 떨어뜨리기도 한다. 다른 지역과 고립된 곳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종을 많이 관찰할 수 있으며, 그 중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것도 있다(10장). 오늘날 우주보다도 알려진 바가 적다는 먼바다(11장). 이곳에서는 빛도 아주 희미하고 해류는 거세지만 그럼에도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은 오늘날 대다수 인류가 거주하는 도시에 관한 부분이다(12장).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지만 먹이도 많고 상대적으로 기온도 일정해 도시를 보금자리로 삼는 생물이 부쩍 늘었다. 우리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지만 말이다.
1926년에 태어난 애튼버러 경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책을 읽었기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책에 실린 설명을 읽으니 저절로 내가 알던 그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속에 맴도는 기분이다. 책 중간에 실린 사진도 아주 고품질이라 맘에 들었다. 본문 중간중간에 조그맣게 삽입된 것보다 본문보다 더 질 좋은 종이에 인쇄된 동식물을 보니 책 내용을 한결 수월하게 이애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생존이라는 답을 찾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물론 이 한 권에 다 담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데이비드 애튼버러를 또다른 다큐멘터리, 또다른 책에서도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본다.
*. 까치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