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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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문제는 명칭이다. 역사 서술을 더 편하게 하고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임의로 '고조선'과 '조선'을 구분하는 것처럼 로마 제국도 계속 같은 명칭으로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서구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 제국은 영원하지 못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Discremen Tertii Saeculi)'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235~284)를 겪으면서 크나큰 정치 혼란을 겪었다. 49년 동안 바뀐 황제가 18명이나 되었다. 이 여파로 로마는 4세기에 쇠퇴해가고 있었다. 제국의 심장이었던 로마는 사두정치(Tetraarchia) 시대에 이미 행정 기능을 잃었다. 더군다나 로마에는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도시도 많이 황폐해졌다. 내전을 마무리하고 유일한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런 이유로 즉시 천도를 단행했다.


  원래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새 수도로 눈여겨뒀던 도시는 세르디카(Serdica, 지금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였으나 내전 중에 비잔티움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원래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은 에게해 연안에 그리스인이 건설한 여러 정착지 중에 하나였고, 이곳을 건설한 '비자스' 왕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도시다. 그리스가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후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 이름 비잔티움으로 불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교점으로 성장했으나, 324년에 수도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쇠락해가는 로마를 뒤로 하고 이 도시는 이때부터 눈부시게 발전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를 여전히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다신교가 아닌 일신교인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황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습은 이전 로마에서의 모습과는 분명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가 옮겨가면서 로마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그만큼 더 다채로워졌다. 그러나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 같은 역사학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은 천 년을 더 이어갔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을 기준으로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니 말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비잔티움이 제국의 이름이 된 것은 그만큼 이 나라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계승했다는 걸 나타내는 것이겠으나 어째서인지 동로마라는 반쪽자리 이름이 더 익숙하고 빈번하게 사용된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이란 명칭도 로마라는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마와 동로마는 분명히 달라야 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건 게르만족이다. 그러다가 고대의 인본주의 전통을 되찾은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은 눈부신 변혁을 맞이했다. 그간 중세 시대가 주로 야만적이고 어둡게 서술된 이유는 그만큼 고대 로마와 근대 르네상스를 찬란하게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대비를 위함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고, 7세기 급격히 팽창했던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냈으며, 성상 파괴론을 통해 신학 논쟁에 불을 지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앞선 동방 문물이 유럽에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으며, 유럽에서 명맥이 끊겼던 고대 헬라스와 라틴어 문헌들을 계속 보존했으며, 그 결과 동로마 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 반도에서 르네상스라는 문예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외면하고서는 476년부터 1453년에 이르는 중세는 물론 유럽 역사의 큰 부분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셈이다.


  기존에 한국에 출간된 비잔티움 역사서에 비해 분량이 적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지만 내 생각에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편집이다. 책 앞부분에 있는 시대별 비잔티움 제국 지도 덕분에 제국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있는 연표에는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이 같이 정리되어 쉽게 비교 가능하다. 책 뒤에는 색인과 용어 정리도 충실해서 필요한 부분을 언제든 다시 찾아보기 좋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 점은 본문 뒷부분에 실린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를 다룬 부분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적으로 유럽이 아닌 곳으로 여겨졌던 오스만과 러시아가 어떻게 이를 매개로 유럽과 상호작용했는지가 명확해진다. 비잔티온,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니예, 그리고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스펙트럼은 명칭만큼이나 유구하고 장엄했다. 



*. 더숲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어 이 책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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