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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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박함, 정겨움, 따스함... 우리가 흔히 '시골'이란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느낌이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추리소설에는 이른바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이란 배경이 곧잘 등장한다. 소수 내부인들로 이뤄진 공간에서 내부인이 일으킨 살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다. 외부와 왕래가 거의 없는 폐쇄적인 집단에서는 구성원끼리 결속력이 끈끈하다. 이 말인 즉슨 외부인을 엄격히 배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외부인이 조용함과 평화로움을 기대하고 시골을, 다시 말해 전형적인 폐쇄 집단을 찾았다간 이런 기대감은 이내 답답함과 겉도는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프랑스 한가운데 위치한 이 고장의 사람들은 비사교적인 동시에 형편이 넉넉하다. 각자 자기 집, 자기 땅에서 살아가고, 이웃을 경계하고, 밀을 수확하고, 돈을 셀뿐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 귀족의 성채도 없고, 방문객도 없다. 아직은 무지렁이 농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제 그 계층에서 막 벗어나 자손을 퍼뜨리고 지상의 모든 부를 꿈꾸는 부르주아들이 이곳을 지배한다. - p.10]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는 키이우 태생이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지만 바쁜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진 못했다. 더군다나 철이 제대로 들기도 전인 나이에 볼셰비키 혁명이 온 나라를 뒤덮으며 고향을 등져야 했다.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파리에 정착한 네미롭스키는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 일이 되었다.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고 파리를 점령하자 박해와 생활고가 더욱 심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가 향한 곳은 이시 레베크라는 시골 마을이었다. 『뜨거운 피』는 이 곳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작품이라고 한다. 한평생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며 살아온 작가에겐 한적한 시골이 오히려 더욱 폐쇄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장에서는 구설수가 마을 끝에 있는 집까지 퍼진다. 전원에서는, 밭과 깊은 숲에 의해 서로 분리된 외딴 거처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많은 일이 일어난다. - p.44]



  사람들이 느슨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곳에서도 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 조용한 마을에 일어난 사망 사고라니, 너무도 큰일이다. 그런데 사고라기엔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면? 워낙에 사람이 적은 곳이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도 뻔하다. 그러나 물증이 없는 게 문제다. 심증과 정황 증거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만으로 충분하다. 제때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 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기억 속에 잠긴 것은 쉬이 잊히는 듯 보였으나 아주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되살아났다.  



[”그렇게 열렬하게 예찬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극도로 분개하며 경멸해야 마땅한 사람도 없고……”

“너무나 큰 애정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도 없고요……”

“아마도…… 나도 모르겠다. 사람은 있잖니……, 내 나이가 되면 피가 식어버린단다. 사람이 차가워지지.”

내가 반복해 말했다. - p.108~109]



  주인공 실베스트르(애칭은 실비오)는 한때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늘상 새로움을 추구하던 남자였다. 그에게 더이상 예전에 넘쳤던 활기를 찾을 수는 없다. 다른 이들과 철저히 거리를 둔 채 외딴 집에서 적막과 고독을 즐긴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았을까? 지금은 지극히 냉소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실비오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갈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들불처럼 번졌던 사랑은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었으나 언제든 다시 불붙을 수 있었다. 끓는 물이 더 빨리 언다는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처럼, 강렬한 사랑이 오히려 더 빨리 사그라드는 것이다. 하지만 물이 얼음이 되었어도, 조건만 갖춰지면 얼음은 다시 물이, 뜨거운 물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우발적이지만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는 사고와 다를 바 없는지 모른다. 사랑은 영원하고 사고는 한순간일까? 누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 일일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발화된 사고가 기억 속에 묻어 뒀던 사랑을 끌어냈다. 이 사랑은 한 사람은 물론 온 마을을 뒤삼키는 들불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묻어두기로 하자. 의도치 않았지만 이 강렬한 감정은  다음 세대에 전해졌으니 말이다. 사랑을 불꽃에 비유하는 건 흔한 표현이다. 불이 계속 타려면 태울 물질이 필요하다. 사랑도 대상이 필요하다. 계속될 수 없는 사랑은 피를 타고 이어졌다. 빨간 것이 사랑이든 불꽃이든, 아니 피이든 간에, 그 색깔은 마을에 우거진 푸른 숲, 방앗간을 지나는 푸른 강줄기와는 너무나 대비된다. 다 타버리고 남은 사랑은 피를 타고 이어졌다. 피가 뜨거운 건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신호를 보내고 길을 그린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쓰라리고 차가운 파도가 우리의 가슴까지 밀려온다. - p.140]


[육체의 욕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육체의 욕망은 헐값으로도 채워진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사랑하고 절망하고 어떤 불로든 타오르길 갈망하는 마음이 문제다. 우리가 원했던 건 그것이었다. 타오르는 것, 우리 자신을 불사르는 것, 불이 숲을 집어삼키듯 우리의 나날을 집어삼키는 것. - p.151]



*. 빛소굴 출판사에서 모집한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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