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존 - 코펜하겐 삼부작 제3권 ㅣ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동화책은 으레 주인공이 시련을 겪다가 결혼을 하며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는 걸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결혼이 어떻게 인생의 종착점일 수 있으며 행복만을 보증해줄 수 있을까. 넉넉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어린 토베를 지탱했던 건 언젠가 시를 쓰겠다는 커다란 열망이었다. 시인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마치 나침반처럼 항상 그 방향만을 가리키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토베는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비고라는 문학 평론가와 결혼했다. 첫눈에 빠진 사랑 앞에서 커다란 나이 차이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결혼 후 마침내 꿈에 그리던 문학계에 가까워지고 자신의 인생 또한 더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을까? 뜨거운 물이 더 빨리 온도를 잃고 냉각되는 것처럼 빠르게 결심한 비고와의 결혼은 금세 싸늘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토베가 사랑했던 것은 비고가 아니라 그의 문학성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피에트라는 젊은 남자와 불륜에 빠지지만 토베는 피에트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이유는 없었다.
비고와의 결혼을 정리한 후 토베는 에베라는 대학생을 선택했다. 비고에 비하면 에베는 평범한 남자였다. 평범함, 그게 토베가 두 번째 결혼을 택한 이유였다. 에베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면 이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에베는 토베가 외면하고 싶었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요람 위로 몸을 굽히고 조그만 손가락들을 만지며 말한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고, 어머니고, 아이고, 그렇네요. 정상적인 보통 가족이 됐어요.” 그러자 에베가 묻는다. “왜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데.”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 되는 건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원해 왔던 일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속에서 찾아온 에베와의 두 번째 아이.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언제나 축복할 일은 아니다. 토베가 원치 않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임신 중절을 통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택하지만 당시 덴마크에서 낙태는 금지되어 있었다. 모임에서 알게된 의사 카를을 통해 겨우 낙태를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토베는 온갖 약물에 중독되고 말았다. 토베 인생 마지막 남자였던 빅토르와 다시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미 약물에 '의존'하게 되어버린 토베는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글을 쓰고 싶었을 뿐인데,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불법적인 일도,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건만 토베의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되돌릴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만 같았다. 인생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정녕 벗어날 수 없는 팔자라는 게 있는 걸까?
얼마 전 발표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에르노에 비하면 토베 디틀라우센의 인지도는 훨씬 떨이질 지도 모르나 사실 내가 받은 충격은 더욱 강렬했다. 코펜하겐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3년 전에야 영미권에서 처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고 한다. 위도가 높은 북유럽의 겨울은 유달리 길다. 토베의 인생은 마치 덴마크의 긴 겨울처럼 갈수록 어두워졌지만 겨울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건 아니다. 그의 작품이 가져다 준 봄이 작가가 죽고난지 한참 후라는 게 왠지 모르게 서글퍼진다.
*.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 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