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부터 역사이고, 어디부터 신화인가? 어떤 개념을 정의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신화와 역사를 구분하는 가장 큰 잣대는 기록이다. 과거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어떤 인물과 사건이 실재했는지, 실재했다면 어떤 면모였을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아무 기록이나 신뢰하기는 힘들다. 그것이 진정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다른 기록들과의 교차 검증이 필수적이다.
인간의 역사는 정말 머나먼 과거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다. 그러다보니 어떤 역사적 인물들은 현대인에겐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되었다. 예컨대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던지, 네로는 폭군이었다던지,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굴다고 주장했다던지, 로베스피에르가 과도한 공포정치를 실행하다가 살해당했다던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는 과학적 진리처럼, 앞서 열거한 역사적 사실들은 의문 부호가 붙을 필요가 없는 상식이 되었다.
모든 학문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법인데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앞선 예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곧 ‘진실’인지 의심해보고 확인해봐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정기문 교수의 이 책은 우리가 여태껏 상식으로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표하면서,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한다.
종교에 별 관심도 없고 성경에도 무지한 나조차 알고 있던 사실이 바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진실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모순점이 많다. 그래서 책의 첫 장의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든 모순을 뒤로 하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기독교가 지금의 위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내세울만한 인물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다윗이었다. 다윗은 당대 인물들의 업적이 뒤섞이고 덧붙여져 실제보다 더 위대해진 인물이라는 게 결론이다.
네로와 로베스피에르를 다루는 장에서는 그동안의 부정적 프레임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네로는 정말 폭군이었나?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펼친 네로는 자연스레 원로 귀족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추진핺다. 네로의 생전이건 사후이건 황제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평민이 아닌 귀족이다. 네로의 실제 행적 이상으로 음해받기에 충분한 환경이 갖추어진 셈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어떤가. 당통의 뒤를 이어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을 전 유럽에 전파하고 당시 혼란스러웠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 모든 변화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법이건만 로베스피에르에게 지워진 족쇄는 너무 가혹했다.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프랑스 대혁명을 최고의 가치로 내건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건축물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역사 속에 흔히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로 끝낼 게 아니라, 나에게 정말로 와닿았던 대목은 소크라테스의 여스승 아스파시아와 동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에 관한 장이었다. 그동안의 역사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차가웠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두 인물은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도 알려지지 않은 수준이다. 최대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역사 분야를 가장 많이 읽는 나에게도 아스파시아와 테오도라는 완전히 낯선 인물이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전승이 끊긴 게 아님에도 왜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일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의 포문을 연 군주로 그동안 충분히 연구가 된 까닭에, 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아스파시아와 테오도라에 비해 남다르게 다가왔다.
역사는 이야기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켜켜이 쌓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를 어떤 관점으로 볼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이기에 우리는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온전히 대할 수는 없다. 오로지 남은 기록에 바탕을 두어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번 학기에 <세계외교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한 학기 내내 ‘거문도 점령 사건’을 배웠다. 논문마다 달리 제시하는 거문도 사건의 발발 원인과 해결 과정에 대한 논거를 읽으며 내 스스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을 온전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당시 상황을 촤대한 재구성할 수는 있지 않을까.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을 마주한다는 게 마치 퍼즐을 짜맞추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