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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ㅣ 교유서가 어제의책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평점 :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신비하고 정체 모를 인물은 단연 빛의 신 를로르를 섬기는 멜리산드레라는 여성이다. 신도들에게 항상 “밤은 어둡고 공포로 가득하니(The night is dark and full of terrors)”라는 말을 전파하며빛의 신을 향한 투철한 신앙심을 강조하는 이 대사는 사실 ‘밤’에 대한 과거 사람들의 인식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골고루 사용하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인간에게 빛이 부재하는 밤이라는 시간은 치명적이다. 빛을 빼앗거나 시각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행동은 이내 낯설고 덜컥 겁이나게 된다. 그리하여 밤은 단순히 빛이 부재하는 시간대가 아니라, 사람들이 조심하고 또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변한다.
잡지, 일기, 여행기, 문학 작품, 학술지 등 온갖 문헌을 섭렵하고 정리한 결과물인 이 책은 우리가 그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밤’이라는 대상 그 자체를 다룬다. 책의 전반부인 1, 2부에서는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밤에 어떤 범죄가 일어났으며, 국가와 국민은 밤에 어떻게 스스로를 통제했는지 온갖 사례들이 나와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밤에는 특히 다른 사람들을 피해서 강력범죄가 일어나기 쉬웠다. 또한 전기가 없던 시대에는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불을 쓰는 게 필연적이었는데, 이는 화재로 이어지기 쉬우니 사고 방지를 위해서라도 불의 사용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구실로 다양한 제재가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상은 책의 후반부로도 이어진다. 계급에 따라 서로 향유하던 밤의 모습도 두드러지게 달랐다. 해가 진 직후나 해 뜨기 전 가장 어두울 무렵 평민들은 낮과 다를 바 없이 노동을 해야 했으나 귀족들에겐 밤이야말로 진정한 유희가 시작되는 때였다. 베네치아의 명물인 가면 축제와 밤하늘을 수놓은 온갖 화려한 불꽃놀이가 좋은 예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 부분이라고 보는데 이 대목에서 당시 사람들의 수면 패턴과 수면 장애에 관한 설명이 뒤따른다. 밤에 잠을 끊어서 두세 번에 걸쳐 수면을 했다는 건 지금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지만 그 와중에 일어나는 수면 장애를 보면 사람 사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전기를 통해 온갖 인공조명이 등장한 이후 밤의 모습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도시의 야경을 이루는 불빛들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 요즘의 밤은 낮보다 더 밝고 활기찬 듯하다. 그러나 불과 몇백 년전만 하더라도 밤은 낮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간이었다. 낮과의 대조를 통한 게 아니라 ‘밤’을 그 자체로 보려는 책의 서술과 저자의 노력 덕분에 새삼스러운 걸 깨달았다. 우리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밤은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음을.
*. 교유당 서포터즈 활동으로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