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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라이프·디자인
기디언 슈워츠 지음, 이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2월
평점 :
한 마디로 말해서 "음악은 예술"이고 "음향은 과학"이다. 이게 내가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음악은 미술과 더불어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분야다. 그러나 미술사는 상대적으로 더 체계적으로 분석되어 있고 미술가들도 여러 사조로 분류가 가능한 데에 비해서 음악사는 (적어도 내가 아는 지식의 한계 내에선) 미술사만큼 활발히 연구가 되진 않았다. 심지어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시대에 따라 어떻게 아름다움에 관한 인식이 바꼈는지를 연구하는 미학의 분석 대상도 대부분 미술이지 음악이 아니다. 추측컨대 이는 미술과 음악의 물리적 특성 때문일 거다.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 작품은 일단 완성이 되면 미술관에 전시된다. 작품이 훼손되지 않는 한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은 실체가 없는 소리다.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음악을 들으려면 직접 공연장에 가야 했다. 악기도 필요하고 연주자도 필요하다. 같은 문화 공간이라도 미술관에 비해 음악 공연장의 입장료가 훨씬 비싼 게 당연했다.
여러 물리적인 제약 때문에 음악의 보급은 미술에 많이 뒤쳐졌다. 그러나 튜브 물감과 기차의 발명과 같은 외부 변수가 인상주의라는 미술사의 커다란 변곡점을 만들어낸 것처럼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실린더라는 발명품 덕분에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게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제는 음악 공연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악기와 연주자가 없어도 집에서 원하는 시간에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음악 재생을 위한 엄청난 발명품들이 계속 나왔다. LP. 릴 테이프, CD, iPod과 MP3 플레이어까지, 음악 저장 매체는 점점 더 작아져 휴대성을 높이고 심지어 이제는 음원이 널리 보급된 덕분에 음악을 구독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 손에 든 스마트폰 하나가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는 물론 음원을 재생하는 음향 기기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높아진 휴대성 덕분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서 재생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혁신적인 일이지만 그 대가로 음질을 희생해야 했다. 책의 표지에 있는 Hi-Fi는 High Fidelity의 약자로 '고충실도'를 의미한다. 원래의 음향에 최대한 가깝도록 높은 음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편리성과 고충실도는 일반적으로 반비례 관계이다. 그래서 음악의 고충실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일상적으로 보급된 시대에도 여전히 예전의 발명품인 값비싼 음향 기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보다 풍부하고 현실적으로 듣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 발명된 물건이라고 해서 최신형 스마트폰보다 열등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늘날의 수요에 맞게 첨단 과학 기술과 최신의 디자인에 맞추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몇십 년 전에 크게 유행하던 레코드판이 요즘 유행 중이라고 한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음원 구독 서비스의 음악과는 달리 커다랗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레코드, 그리고 이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기까지 필요해 편의성이 생활 도처에 자리잡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는 언뜻 맞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히 예전에 유행하던 것이 요즘 다시 유행하는 레트로 현상은 물론 물리적 매체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정감과 미학적 감성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득 몇 년 전 경주에 있는 대중음악박물관에서 수많은 음향 기기들을 본 게 생각났다. 희미해진 기억이 되살아난 건 책에 실린 풍부한 사진 자료들 덕분이었다. 책의 절반 정도가 사진 자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실린 덕분에 책에 실린 내용은 거의 다 내가 처음 접하는 낯선 내용들이었지만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몇십 년 간의 음향 기기 변천사를 접하니 나도 저런 기기 하나쯤은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소비 습관의 가장 큰 기준은 가성비인데 음향 기기는 사실 가성비와는 아주 거리가 먼 영역이다. 하지만 살면서 내내 가성비만 외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분야라면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신경 써도 괜찮지 않을까.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원래 즐겨 듣던 힙합은 물론 클래식이나 재즈 같은 음악을 듣는 시간이 무척 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들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여러 기기들을 인터넷 쇼핑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고민하는 중이다. 음악은 이렇게 삶에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나 보다.
*. 을유문화사의 서평단 이벤트 활동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