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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5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0월
평점 :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라는 작가와 그가 남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 그 자체다. 표트르 대제의 야심작인 이 도시는 모스크바보다 더욱 유럽에 가까운 곳에 건설되었고, 발트해를 통해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원래 늪지대였던 이 지역에 제정 러시아의 중심 도시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데에는 물론 야심찬 정복 군주였던 표트르 대제의 역할이 컸지만 이곳은 러시아가 유럽의 제도와 가치를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러시아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복잡한 공간이었다. 즉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라는 한 사람의 야욕을 넘어 시대와 제국의 욕망이 얽힌 곳이다. 두 번째는 러시아의 관료제와 우크라이나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태생이었던 고골은 학업을 마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하급 관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토속적인 생활상과 러시아 정교의 가치관을 옹호하던 고골의 입장에서 수직적인 관료제가 지배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저히 참기 힘든 공간이었다.
고골의 대표작인 <감찰관(1836)>은 이전에 다른 판본으로도 여러 번 번역이 되었으나 다른 희곡 작품인 <결혼(1842)>과 <도박꾼(1842)>은 많이 생소한 작품이다. 분량은 짧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솔직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고골이 이 작품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감찰관 은 오해와 착각이 빚어낸 (관객들 입장에서) 희극이자 (등장인물들 입장에서) 비극이다.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온 하급 관리가 어느 마을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부패가 일상이 되어 버린 마을 관리들에게 감찰관으로 오해를 받아 온갖 뇌물과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그가 진짜 감찰관이 아님이, 그리고 진짜 감찰관이 마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결혼 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 간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결혼은 사회적으로 일반적이고 당연히 이뤄져야할 관습이지만 정작 주인공은 결혼이 내키지 않는다. 하급 관리이지만 본인의 체면과 출세를 위해 그러나 결혼은 어쨌든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사랑보다는 온갖 이해타산이 얽히면서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훨씬 복잡한 문제로 변모한다.
#도박꾼 은 사기 도박을 하려던 사기꾼이 사기단의 권유를 받아 더 큰 음모를 꾸미지만 자신 역시 사기단의 먹잇감이었을 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세상에게 울분을 토하는 내용이다. 당대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도박이라는 행위 속에서 인간 관계의 기본 바탕이 되는 신뢰라는 가치는 여지없이 무너질 뿐이다.
19세기 제정 러시아는 워낙에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였고 작중 배경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가치관과 질서가 충돌하는 공간이었기에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골 연구자인 옮긴이의 충실한 주석 덕분에 풍자와 해학이 드러나는 고골 특유의 서술 기법이 그리 난해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들은 '선진적'이었던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작중 인물들도 심심치 않게 프랑스어와 이를 음차한 외래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틀린 철자가 많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들어있어 이들의 허세가 돋보인다. 고골이 사용한 또다른 장치는 적절한 방백이다. 희곡은 관객이 있는 무대에서 상연하는 것을 전제로 쓰여진 대본이기에 시점과 서술 방식에 따라 여러 경우의 수가 있는 소설과는 달리 작가의 의도를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작중 인물들이 내뱉는 (독백이 아닌) 방백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상충하는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동시에 작품의 주제 의식을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하려는 고골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제 낯짝 삐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 - 러시아 속담
*. 을유문화사의 신간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