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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사건과 집단히스테리
니홀라스 할라스 지음, 황의방 옮김 / 한길사 / 2015년 8월
평점 :
카프카의 소설만큼이나 갑작스레 벌어진 이 사건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다.1894년 9월, 알자스 태생의 유대인인 프랑스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는 독일군의 스파이 활동 혐의를 받아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은 만장일치였는데, 이에 의거하여 그는 프랑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기아나 근처의 '악마섬'으로 종신 추방되었다.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검찰 당국이 제출한 여러 문건 중 명세서 한 장만이 공개되었는데, 독일 대사관으로 보내진 이 명세서에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유사했기에 그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 사람을 중대한 범죄행위의 용의자로 지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나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는 반유대주의에 물든 군 상층부의 눈밖에 났기에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항변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프랑스군, 가톨릭 교회, 보수우익 언론들은 일제히 조국을 배신한 '유대인' 드레퓌스를 일제히 비난하고 반대유대주의 선동을 공공연히 시작한다. 드레퓌스는 머나먼 악마섬에서 혹독한 복역을 치러야 했으며 곧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권리마저 빼앗긴다. 그의 운명은 억울한 유배 생활을 하며 쓸쓸히 죽음을 맞는 수밖에 없었던 와중에 진실이 드러나며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2년 후인 1896년 참모본부 정보국 소속의 피카르 소령이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열람하고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증거가 없다'는 것과 오히려 명세서의 필체는 정보국 방첩대 실무자인 헝가리계 에스테라지 소령의 문체와 유사하단 걸 밝혀낸다. 피카르는 상층부에 보고했지만 이 모든 책임을 질 의지가 없었던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하고 은폐하려 했으며 피카르는 한직으로 좌천된다. 이 사건이 보도가 되면서 프랑스는 양분된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재심 반대파는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정의 이념을 거부하고, 군의 위신을 존중하며 국가 안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라는 주장을 하지만 주로 양심적인 지식인층과 공화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재심 요구파는 이에 반대하며 명확한 증거없는 국가 주도의 일방적인 마녀사냥을 비판했다.
열세였던 재심 요구파에 한 줄기 빛이 되었던 건 프랑스의 대문호인 에밀 졸라의 글 덕분이었다.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만연한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에 크게 충격받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르로르(L'Aurore: 여명)》이란 문학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글을 통해 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것이다. 원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평범한 제목의 이 글은 당시 편집장이었전 조르주 클레망소가 제목을 바꾼 것이었는데, 아무 근거 없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것과 스파이 행위의 증거가 명확한 에스테라지를 무죄석방한 두 차례의 군사법정을 거세게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강렬하고 도발적인 글이었기에 훨씬 더 호소력있는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이후에도 잡음이 있었지만 결국 사건 발발 10년 후인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으며 2년 후인 1906년 7월 마침내 무혐의를 인정받고 최종 복권되었다.
책의 지은이인 니홀라스 할라스가 이 책의 제목을 졸라의 글과 동명으로 『나는 고발한다』로 지은 이유, 그리고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 사건을 다룬 이유는(아렌트는 이 책에서 반유대주의-제국주의-전체주의가 어떤 흐름으로 이어졌는지 고찰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제국주의 직전에 언급했다) 이 과거의 사건이 갖는 현재성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사상과 거짓 정보를 마구 유포하고 선동하여 여론을 잘못된 방향으로 호도한 탓이지만 이는 지금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드레퓌스 한 사람만이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볼 순 없고 오히려 우리 모두가 또다른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 한길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