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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XY, 여성은 XX라는 염색체의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X와 Y는 이웃하는 알파벳이지만 사실 이 사이의 간극은 ‘화성’과 ‘금성’ 사이의 거리만큼 멀다. 성별의 차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보부아르의 말대로 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성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인식되는 성 역할을 설명하고자 젠더(gender)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성이 어떻게 ‘여성’으로 규정되나라는 문제 의식으로 이 작품을 썼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여성의 인권이 사회 전반에 자리잡고 성평등 지수도 높은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등 전통적인 성 역할을 탈피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자신이 집안에서 겪은 것들은 사실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 그러니까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적인 성 역할에 끊임없이 부딪친다. (“내 소녀 시절을 선으로 그린다면 직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선은 직선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 p.102)
어린 시절의 교육과 환경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인공이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의 일원이 될수록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세간의 인식, 그 사이에 존재하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일 뿐이다. (“어쨌든, 나는 나에게 ‘뭔가 부족하다’라는 사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자아이는 모두 다, 여자는 모두 집안일에 신경을 써야만 하니까, 더욱이 그게 장차 내 직업이 될 테니 나도 이런 일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p.107) 그리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 아니 한 명의 인간이라는 주체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주인공의 처지는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한 채,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라는 역할에 가려져, 아주 조그마한 충격으로도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얼어붙은’ 객체로 전락한다.
얼마 전에 읽은 <랭스로 돌아가다>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글쓰기는 아르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에리봉도, 에르노도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한 작품을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누구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상이한 가치 사이의 경계를 흩뜨렸다. 남자로 태어난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여자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러한 노력을 멈출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작지만 큰 발걸음이었다.
*. 레모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