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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평점 :
40억년이 넘는 장대한 지구의 시간 속에서 인류가 출현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그중에서 우리의 조상인 현생 인류가 등장한 것은 극히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지구는 거대한 생명체와 같아서 지구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은 상호작용하고, 지구에 몸담고 있는 생물들 역시 복잡한 먹이사슬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인간도 명백히 이 중 일부였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 중 하나인 인간의 역사는 다른 생물에 비해 몹시 짧지만 유례없는 속도로 발전해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생태계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식생의 분포가 바뀌고, 플라스틱 같은 전에 없던 물질이 온 지구를 뒤덮고, 지구의 평균 기온이 높아지는 등 전례없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고려해서 현재의 지질시대 명칭을 인류세로 변경하자는 것이다. 이는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치켜세우는 인간중심주의의 맥락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이를 경계하자는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질학에서의 연대 구분은 객관적인 증거를 근거로 요한다. 지질학자들이 어떠한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선 지층에 기준으로 삼을 변화점이 명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질학의 다른 시대 구분과는 달리 인류세는 그 시점을 어디서부터 보아야할지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논쟁이 분분하다. 다시 말해 언제부터 인간이 본격적으로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느냐가 아직 논쟁의 대상인데 농업혁명, 콜럼버스의 교환, 산업혁명, 최초의 핵실험 등 저마다 다른 기준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들이 지금의 홀로세(Holocene)와 구분되는 지층 흔적을 남기기엔 아직 조금씩 부족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류세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아직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급속도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구의 시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지금껏 지층에 축적된 데이터는 극히 미미하고 이것이 훗날 어떻게 평가받을 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로 남아있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만큼이나 반론도 만만치 않기에 인류세가 공식적인 지질학 연대 구분의 하위 항목에 포함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인류세 논의의 진정한 의미는 '경각심'에 있다. 지질학적 연대 구분을 재정의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을 자각하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인류세 공인 찬반 여부와는 상관없이) 동의할 것이다.
이를 고려해볼 때 인류세가 정말로 지질학의 한 시기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1장 기원들, 2장 지구 시스템, 3장 지질시대에서 학계에서 정설로 자리잡은 개념들을 소개하고, 4장 거대한 가속에서 인간의 출현 이후 어떤 변화의 징조가 나타났는지 알려주고, 이를 5장 안트로포스(Anthropos), 6장 오이코스(Oikos), 7장 폴리티코스(Politikos)에서 각각 인류학, 생태학,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고, 마지막 8장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는 이 책의 구조는 아직 정립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인류세라는 복잡한 개념을 다층적으로 알려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선사했다. 그 이후 인간은 비로소 야생을 벗어날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아는 자'라는 그의 이름처럼 미래를 꿰뚫어보는 '선각자'였다. 인류세 논의가 바라건대 우리의 미래를 조망하는 창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미래는 다름 아닌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 교유당 서포터즈 활동으로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