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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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방정식의 차수가 하나씩 늘면 고려해야할 변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상이 두 개라면 그 사이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대상이 세 개라면, 하나의 대상을 기준으로 다른 두 대상과의 관계를, 아니면 셋 모두를 아우르는 핵심을 찾아야 한다. 이야기가 훨씬 복잡해진다. 내가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알게되었을 떄 쌀-재난, 재난-국가의 관계는 금방 떠올랐지만 국가-쌀이라는 삼각형의 다른 한 변을 좀처럼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서문과 프롤로그만 읽어도 저자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쌀, 재난, 국가라는 키워드는 삼각형의 꼭지점이기도 하지만, 한 직선 위에 놓여있는 같으면서 다른, 세 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화두다. 냉전 이후로 소련을 위사한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은 곧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 자본주의가 전세계 시스템의 패권을 쥔다는 것을 의미했다. 능력과 보상을 두 기둥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에게 그 어느 때보다 평균적으로 윤택한 삶을 선사했지만, 이와 동시에 빈부의 격차를 극단적으로 심화시키는 원흉이기도 하다. 불평등의 이유를 밝히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불평등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지만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세부적으로 다르니 같은 잣대로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쌀’이란 식량을 연원으로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불평등 문제를 파고든 이유다.

불평등에 으레 따라나오는 것은 재산과 계급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한 이후 잉여 생산물을 비축하는 과정에서 사유 재산과 계급 제도가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전세계의 주식은 쌀 아니면 밀이다. 강수량이 높고 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밀이 아닌 쌀을 재배했다. 밀에 비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영양소도 많고 재배 면적 당 인구 부양력도 높은 쌀은 동아시아의 인구 밀도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동아시아의 강수량은 여름철에 집중된다. 즉 벼농사의 핵심은 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물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수준으로 적절히 관리하려면 개인이나 마을의 노력만으론 한계가 있다. 서구권에 비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출현이 훨씬 빨랐던 이유다. 국가만이 아니라 평소에 효율적인 벼농사를 위해선 이웃들과 힘을 합쳐 돌아가며 농사일을 서로 돕는다. 두레와 품앗이로 대표되는 이 행위는 마을 단위의 네트워크를 전국에 촘촘하게 깔아준 원동력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구성원들간의 위계 질서를 심회시키기도 했다. 경험이 우선이다보니 청년보단 연장자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공제의 배경이기도 하다.

개인보다는 개인이 속한 집단과 국가의 기능이 더 큰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 상황에서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정부 당국은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여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했고 시민들도 대체로 지시를 잘 따랐다. 농사 인구가 해마다 줄어들어 식량 자급자족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지만 이 성공적인 방역 체계는 벼농사 체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꽉 짜여진 행정 체계의 이면에는 서로를 도우면서 감시하는, 즉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농경 사회의 오랜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다.

책의 논의는 코로나를 넘어 한국 사회 특유의 연공제와 이로 인한 불평등 문제를 언급한다. 능력에 따른 보상이 보편화된 오늘날이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근속연수가 높을수록 더 큰 보상을 받는 연공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연공제는 치열한 경쟁을 넘은 이들에게 달콤한 보상이기도 하다. 시험공화국이라는 말처럼 우리나라는 학생부터 직장까지 시험이라는 평가 기준이 아주 보편적이다. 업무와는 큰 상관없는 객관식 위주의 시험이 학벌과 경력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 보상이 너무도 달콤하기에, 시험 준비에 쓰이는 온갖 비용과 시간, 그리고 불합리성은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도 인지하고 있듯이 이 책은 한국 사회에 내재된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쌀에서 찾기에 ‘쌀 환원주의’로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한국의 불평등이라는 고차방정식의 해는 단 하나가 아니겠지만 저자의 주장과 근거는 그만큼 명쾌하다.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균,쇠>가 환경결정론으로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비판받지만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쉬이 간과할 수는 없듯, 한국의 불평등의 원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자료를 정리하고 결론을 도출해낸 저자의 노력은 인상적이다. 현재진행형인 재난인 코로나 상황에 대한 분석이 다른 내용보다 짧은 것은 아쉽지만 이것은 다른 내용에 비해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다음 책에서 논의해도 충분할 것이다. 오늘도 쌀밥을 먹으며 불평등 연구자인 저자의 불평등 3부작의 마지막을 기대한다.


*. 문학과지성사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서평 게시용도로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서평은 출판사와 무관하며 전적으로 제 의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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