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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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건 단 한 글자에 불과한 단어지만 사실 매우 복잡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언제나 타인과 같이 지내야하지만 타자와의 관계 속에 매몰되어선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이기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언뜻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는 공존할 수 없다. 이는 이율배반이다. 하지만 삶은 논리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근본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다시 말해 인생은 곧 남과 어울리는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고전을 탐구해온 프랑스의 철학자인 저자는 더불어 존재하는 것을 ‘합치’, 홀로 존재하는 것을 ‘탈합치’란 개념으로 정의한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 보면 합치와 탈합치는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상보적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순히 서로의 반대가 아니라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개념인 것이다. 합치와 탈합치가 양자택일의 문제라면 우리의 삶은 반쪽자리,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못할 것이다. 두 개념이 조화롭게 작동할 때 우리 삶은 비로소 완전함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개념을 성서, 회화, 문학, 철학 등 인류 지적 탐구의 산물인 분야에도 적용시킨다. 평화로운 에덴동산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 것은 절대 건드려선 안될 과실을 탐하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 <바르셀로네타 해변>이란 그림은 화폭에 어긋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정돈된 합치에 반기를 들고 탈합치가 일어나면 균열과 갈등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균열과 갈등이야말로 우리 삶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한자에 능통한 저자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거상합’이라 지으려했으나 평소 저자와 교류가 있던 역자는 한국의 맥락에 맞춰 고민끝에 이를 탈합치란 단어로 명명했다. 정-반-합의 세 요소가 끊임없이 이어져 완전함에 가까워지는 헤겔의 변증법을 연상시키는 거상합은 우리의 삶이 우연과 필연, 동시성과 지속성의 조화의 결과물임을 주장하고자 그런 용어를 쓰고자 한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언급하며 가벼움과 무거움이 지향하는 삶을 보여준다. 그의 묘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당위성을 뒤흔든다. 파묵은 <하얀 성>에서 ‘나’와 ‘호자’라는 인물을 통해 서로 다른 환경이 두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서 어떤 혼란과 합일이 일어나는 지를 그려낸다. 삶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선 여러 측면을 조망해야 한다. 그렇기에 합치와 탈합치는 상보적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하는 능동적인 태도가 곧 존재의 바탕임을 역설한다. 또 파스칼은 인간을 “쌩각하는 갈대”로 규정한다. 탈합치는 합치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합치에 머물러 있다면 삶은 퇴색한다.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합치란 호수에 탈합치란 돌멩이를 던진다면 우리 삶은 보다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 와중에 잊어서는 안된다. 바람에 몸을 맡겨 유연함을 유지하는 갈대처럼 삶은 합치와 탈합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삶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고민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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