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문지 스펙트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 한 구석에 있는 책장에는 언제 산건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은 책이 많이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장편소설 <몰락하는 자>도 그 중 하나이다. 이문열은 몇 해 전 출간된 그의 중단편전집 서문에서 장편과 단편소설의 구상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피력한 바가 있다. 비록 '소설'이라는 형식에 해당한다고 해도 그만큼 장편과 단편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두 글의 차이는 단순히 분량만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른하르트라는 생소한 작가를 바로 장편으로 접하기엔 왠지 모를 부담감이 있었다. 마침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문지 스펙트럼>이라는 시리즈로 그의 대표 단편선을 발간했다기에 2차분으로 출간된 5권 중에 나는 이 책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더 많고 다양한 소재와 플롯을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총 10개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두 베른하르트의 작품 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모든 작품들은 줄거리보다는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 세게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물의 내적 독백은 배경 묘사와 뒤섞여서 몹시 긴 호흡으로 계속 이어진다. 카프카나 만의 작품처럼 베른하르트의 작품 역시 문장의 길이가 대체로 매우 길고 문단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 실린 글들은 짧은 분량에 비해 독해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이렇게 어두운 내용의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아닐까? 베른하르트는 조금의 꾸밈도 없이 삶의 고통을 마주하는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를 쉬지 않고 서술하기 때문이다. 공포, 단절, 불안, 부조리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고 이어지기에 우리는 모두 삶이란 지도에서 정확한 목적지도, 방향도 모른채 끊임없이 방황할 뿐이다.


  쉬이 읽기도 힘들었고 누군가에게 선뜻 추천해줄 정도로 플롯이 매력적인 작품은 더욱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본 문학 작품 중에선 이만큼 현대인의 심리를 날것 그대로 잘 드러낸 소설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제대로 질병으로 취급도 못받던 정신질환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인간이란, 정신이란 본디 너무나 복잡하기에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개별적이고 단편적으로 치료하기엔 힘들다. 우리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은 문제에 답을 알려줄 정도로 만만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베른하르트의 글이 그러하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