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만든 세계사
함규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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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언제부터 '벽'을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벽을 세우고 편을 나눔으로써 대상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벽은 벽일뿐 그 자체론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럼에도 벽이란 단어가 부정적인 느낌을 연상시키는 까닭은 벽이 단순히 어떤 집단과 공간을 구분하는 물리적 실체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그들', 즉 '이편'과 '저편'을 나누는 차별의 도구로 이용된 적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벽의 첫 번째 목적은 나와 우리를 보호하는 방어의 성격이 짙지만 이내 벽은 공격적인 수단이 되어 차별과 분단을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인기 프로그램인 <썰전>에 출연하여 다양한 역사적 소재와 사건을 흥미롭게 전달해주었던 저자 자 함규진 교수는 서문에서 밝힌 대로 모든 역사를 훑는 대신 기억할 가치가 있는 여러 벽들을 4부 12장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1부의 고대의 만리장성과 하드리아누스 장벽, 중세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모두 외적들로부터 자국민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너무도 긴 길이 때문에 만리장성과 하드리아누스 장벽이 정말로 실용적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것들은 방어적으로, 때로는 공격적인 기능을 다하며 제국의 국경선 역할을 했다. 이후에 만리장성에 다소 부정적인 편견이 씌워진 이유를 중국과 한국에 뿌리 깊게 이어진 유교적 전통 때문으로 설명한 대목이 튿히 인상적이었다. 농업을 중시한 유가 사상에게 대규모의 토목 공사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오랫동안 그 위엄을 지킨 채 도시를 굳건히 지켜주던 든든한 존재였지만 날로 발전하는 공성 기술과 침략자들의 끈질김 때문에 결국 그 역할을 다 한다.   


    2부에선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 장벽과 파리 코뮌 시절에 시민들의 저항을 위해 설치된 장벽을 다룬다. 어느 영국 이민자의 토끼 사냥을 하고 싶었다는 지극히 사적인 취향 때문에 처음 호주에 들어온 토끼들은 유럽보다 훨씬 더 온화한 기후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한다. 물리적인 벽을 세우고 이것으로 소용이 없자 대규모의 토끼 사냥, 심지어는 토끼를 잡을 바이러스까지 쓰지만 이 모두에 적응한 토끼들은 지금 이 순간도 식물의 씨앗까지 통쨰로 먹으며 손 쓸 수 없이 불어나 호주의 사막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주범으로 꼽힌다. 이어지는 파리 코뮌과 3부의 마지노선, 게토 장벽, 베를린 장벽, 한반도 군사분계선, 4부의 팔레스타인 장벽, 각종 난민 장벽은 모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연관이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황폐화된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은 벽을 남겨 여전히 공간과 집단을 단절시킨다. 한국전쟁이 종전도 아닌 휴전으로 일단 마무리되고 여전히 분단이라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나라에겐 이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올 테다.


    책의 마지막인 4부 12장에선 물리적 실체를 가진 벽이 아닌 인터넷 공간의 사이버 장벽을 다룬다. 악명 높은 중국의 '황금 방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크게 제한하고, 다국적 IT 기업의 중국 진출을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다. 중국 정부와 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중국의 IT 기업들은 내수 시장을 넘어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지만 이에 따른 반작용 역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물리적이진 않지만 이 사이버 장벽 역시 집단을 나누고 차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열거한 벽들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벽은 눈에 띄는 주연은 아니더라도 역사의 줄기를 바꾼 커다란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장을 보태 세계사(World History)는 곧 벽의 역사(Wall-ed History)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이다.


    저자의 인상적인 서문을 인용하고 재구성하여 글을 마무리한다. "인류는 장벽을 통해 '자신들'을 '저들'과 구분 지었고, 그리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장벽을 새롭게 세울 것인가, 기존의 장벽을 무너뜨릴 것인가? 장벽 '이편'과 '저편'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책의 내용에서 무엇을 인식하고, 아마도 자신의 눈앞이나 손끝에, 또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장벽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지,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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