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과거 모든 시대에, 광장은 항상 존재하였던 것이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507
미하일 바흐친 지음, 이덕형 외 옮김 / 아카넷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그의 책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워낙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찐(Mikhail M. Bakhtin 러시아, 1895∼1975)은 1895년 1월 17일 모스크바 남부의 오룔(Oryol)시에서 은행원 미하일 니꼴라예비치 바흐찐과 바르바라 자하로브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5년 12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노동자계급해방동맹”을 결성한다. 이것은 앞으로 바흐찐의 앞날에 펼쳐질 러시아 혁명의 파고가 그의 삶에 어떤 험난한 역경들을 펼쳐질지 미리 예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바흐찐은 이미 12살 무렵을 전후해 독일어 철학서를 탐독하기 시작했고, 1918년 대학 수업을 마친 그는 M.I.까간, 뿜빤스키, V.N.볼로쉬노프 등과 함께 이른바 ‘바흐찐 써클’을 결성한다. 1928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트로츠키가 전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스탈린과의 투쟁을 호소할 무렵 바흐찐은 우익지식인 그룹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친구 뿜빤스키와 함께 체포된다. 이듬해 바흐찐은 지정 주소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예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만 여러 번의 심문 끝에 유죄판결을 받고 강제수용소 5년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때 바흐찐은 다발성 골수염이 악화되어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30년 그는 부인과 까간, 고리키, 알렉세이 톨스토이 등의 탄원으로 금고5년형에서 추방 5년으로 형이 감형된다. 이해 마야코프스키가 자살한다. 1932년 그의 형 니꼴라이가 망명하여 영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문학박사 및 철학자로 활동하며 비트겐슈타인과 교류한다. 유형기간이 종료된 뒤에도 바흐찐은 카자흐스탄에 머물며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34년 소련은 제1회 전소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본적 창작방법으로 승인한다. 그는 나이 40세에 이르러 동료 메드베제프의 추천으로 모르도바 교육대학에서 문학개론과 문학교수법을 담당해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무렵 소련에서는 형식주의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고, 학자와 예술가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개시된다. 이듬해 바흐찐은 스스로 학교를 퇴직하고 모스크바 근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한다. 42세에 다발성 골수염이 악화되어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1942년 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에서 '문학장르로서의 소설'을 발표(훗날 '서사시와 장편소설'로 개칭)하지만 곧 독소전쟁이 발발한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어머니와 여자 형제가 모두 사망한다.

바흐찐의 논문도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 없어진다. 다행히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모르도바 대학 교육대학 일반문학 담당 조교수로 임명되어 강의하게 되었다. 1950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의 문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수정해 제출한다. 같은 해 형 니꼴라이가 영국에서 사망한다. 1961년 정년퇴임한 뒤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를 출판한다. 이 책을 통해 바흐찐은 학계의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69세이던 1965년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의 문제"가 정식으로 출판된다. 1967년 그에 대한 이전 판결의 혐의가 벗겨져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1973년 그의 나이 77세에 이르러 바흐찐 연구자 이바노프에 의해 메드베제프와 볼로쉬노프의 이름으로 저술된 상당수의 논문들이 바흐찐의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1975년 3월 7일. 러시아 혁명이란 역사의 파란 속에서 도리어 민중의 웃음에서 건강한 희망과 하잘 것 없는 것으로 평가받던 카니발(축제)에서 민중의 가치 전복성, 소통에 대한 굳은 믿음을 선사해준 미하일 바흐찐이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간단하게 살펴 본 바흐찐의 생애다.

역사적으로 정의된 민중문화의 웃음의 형식은, 일반적인 엄숙함에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일방적, 도그마적 엄숙함의 형식에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고대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장르에서 가장 심오하게 표현되고 있었던 비극적 엄숙함을 알고 있었다. 비극적 엄숙함은 보편주의적이다(그러므로 <비극적 세계관>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또한 비극적 엄숙함은 창조적인 파멸의 이데아가 스며들어 있다. 비극적 엄숙함은 절대적인 독단주의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적 비극은 도그마적 웃음처럼, 불가능한 것이다(고전주의적 비극은 독단주의를 제압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본보기이다). 독단주의는 그 어떤 형식과 다양성 속에서도 진정한 비극을, 진정한 웃음을 모두 사멸시키고 만다. 고대문화의 제반 조건 속에서 비극적 엄숙함은 세계에 대한 웃음의 측면을 배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과 공존하고 있었다. …<중략>… 고대의 엄숙함은 웃음이나 패러디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웃음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정하고 보완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에서 공식문화와 민중문화 사이에는 중세에서와 같은 그러한 첨예한 대립은 있을 수 없었다. …<중략>… 진정한 웃음은 양면가치적이고 보편적이며, 엄숙함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정화하여 그 자리를 메워준다. 독단주의, 일면성, 경직성, 광신(狂信)과 무조건성, 공포와 위협적 요소, 교훈적 성격, 소박성과 환상, 조악한 일차원성(一次元性)과 일의성(一意性), 우둔한 목청 돋구기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본문 193-195쪽>

바흐찐에게 어쩐지 최인훈이 4.19직후 잠시 동안 해방된 남한의 한 귀퉁이에서 발표한 "광장"이 연상된다면 최소한 나의 기준으로는 정확하게 본 것이다. "광장""밀실", 혹자는 광장은 남한을, 밀실은 북한을 상징한다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광장과 밀실은 인간의 야만이 문명 속에서도 잔인하게 꽃피듯 어디에나 있다.

바흐찐은『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의 서문에서 프랑수아 라블레의 문학사적 위치를 유럽 근대문학의 창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단테, 보카치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의 대열에 올릴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라블레가 이들 근대문학의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민주적인 작가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라블레가 "다른 작가들보다 민중적(民衆的)원천들, 특히 그 특징적인 원천들과 밀접하고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여 년에 걸친 민중문화의 발전 속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는 라블레의 이런 요소들이 비록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며 퇴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런 요소들은 살아남아 있다.

웃음의 퇴화(退化) 과정은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던 것인가?
17세기에는 절대군주제라는 신질서의 안정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롭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전세계 - 역사적 형식>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 형식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고전주의 미학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찾아내고 있었다. 합리주의와 고전주의는 새로운 공식 문화의 기본적 특징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는 교회-봉건 문화와는 상이했지만, 비록 도그마적인 분량이 적었을 뿐, 이전과 같은 권위주의적인 엄숙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르크스의 말에 의하면, 새로운 지배 계급이 필연적이고 영원한 진리라고 제시하는 새로운 지배 개념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165쪽>

바흐찐은 라블레에게 있어 그로테스크(Grotesque)한 기법(바흐찐의 문학 이론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카니발적 현상이 하나의 역동적인 소설 기법으로 수용된 문학 양식. 기존의 고정된 사물의 형태나 예술적  양식을 일그러뜨리거나 과장된 모습으로 부풀려 자유분방하고도 기상천외한 형태로 재창조해 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그릇된 전체상을 파괴하고 재정립하며, 사물과 관념사이의 허위에 가득 찬 위계적 연결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해체하고, 그로부터 사물들을 해방시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타고난 본성에 맞는 자유로운  결합과 이상적인 생명성의 고양에 이를 수 있도록 하려는 예술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계급과 국가 사회 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앞서 살펴본 고대세계에서 공식문화와 민중문화 사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성(神聖)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엄숙함과 우스꽝스러운 관점"들은 모두 거룩한 것, 다시 말해 공식적인 것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근대 부르주아 문화와 미학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웃음에 대한 그릇된 문학연구들은 웃음의 요소를 가장 미천한 곳에 자리하게 하였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기법)에 기반한 웃음은 비공식적인 관점의 위치로 전락하였다.

중세의 웃음은 모든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영역들과 모든 공식적인 삶과 사회 생활의 엄격한 형식들의 범주 외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략>… 중세 공식 문화의 특징은 일방적인 엄숙함의 음조였다. …<중략>…  성 요한크리소스톰은 어릿광대와 웃음이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악마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항상 엄숙해야만 하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 참회해야 하고 슬퍼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문 125쪽>

바흐찐은 계급문화 속의 엄숙함 -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것이며 강제와 금지, 제약들로 이루어진 - 은 항상 공포와 위협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중세 민중들은 이런 엄숙함의 공포와 위협에 대한 승리가 웃음에 있음을 감지하였는데, 웃음은 도적적 공포를 무화시키고, 죽음과 내세에 따르는 징벌, 지옥에 대한 승리로 이끌어 내는 요소로 보았다. 축제(카니발)은 모든 공식적인 체계들의 효력과 금지들, 계층 질서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힘을 지녔다. 오늘날 "문화연구"에서 대중문화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흐찐이 주장하는 카니발의 이런 속성에 기대고 있다. 카니발은 공식문화(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닌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문화형식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대중의 즐거움, 웃음은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공식문화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한 방식으로 이를 기이한 형태로 뒤바꿔 버린다.(존 피스크 식으로 말하자면 대중은 수동적 거부로부터 적극적 거부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지배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물론 이때 가장 적극적인 거부는 텍스트의 전복적 다시 읽기를 통한 새로운 텍스트의 창조다. 종종 이것은 패러디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흐찐은 17세기 이후 웃음의 퇴화 해체 과정이 웃음의 지배 영역을 점차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웃음은 역사적, 보편적 개성(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시대 정신"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를)을 풍자하는 것에서 점차 개인적인 조롱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한다. 그는 이것이 17세기로부터 시작해 18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모델 자체가 일반화, 경험론적 추상화, 전형화와 같은 요소들의 의의가 현저하게 증가된 결과 개별적인 단독자(單獨者)가 남게 된 까닭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 출현한 것이다. 바흐찐은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쾌한 상대성"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유쾌한 상대성"이란 바흐찐의 표현대로 타자에 대한 배려, 타자의 입장으로 나를 전이시키는 상호주관적인 인식 태도를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 존재는 세계와의 화해, "삶과 죽음과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닌 유기적 전체처럼 부분과 부분들의 공존을 전제하면서, 그들의 전체가 단일한 하나의 총체적 형상을 구현하는 세계감각이며, 공존의 의지마저 상실하게 될 때 세계는 "거대한 미로"가 된다고 말한다.

16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라블레의 소설을 읽고 웃었는데, 웃는다고 해서 그의 소설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쾌활한 웃음은 웬일인지 경멸당하고, 차원이 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본문 188쪽>

바흐찐은 합리적 이성에 기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새로운 엄숙함을 만들어냈음을 비판한다. 나의 개인적인 추측임을 전제로 이야기하자면 바흐친이 이런 비판을 가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 스탈린 체제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공식적이고 기본적인 창작방법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채택할 무렵 유형생활을 떠나야 했던 경험, 지노비에프와 트로츠키가 숙청되는 등, 한 때 혁명동지로 강철 같은 대오를 자랑하던 이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모함하며 잔인한 숙청을 일삼던 시기를 살아낸 경험 말이다. 그렇기에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바흐찐 자신도 그런 경험을 치렀다. 이때 유형지에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들에게 금지된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극을 해결한 뒤 윌리엄 수사가 한 그런 말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흐찐은 공식적이고 성스러운 것(공식문화)들이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한 것들을, 삶의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들로부터 인간 자신을 해방하는 힘으로 웃음을 선택했다. 나의 결론을 대신하여 이 책의 말미에 적힌 바흐찐의 생생한 목소리를 옮기는 것이 낫겠다.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결코 지배계급의 공식문화와 합쳐지지 않았던 민중의 독특한 웃음 문화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 인류 역사의 문화적, 문학적 삶과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를 조명할 때에, 우리는 자주 "각 시대의 말을 믿도록", 즉 그 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많건 적건)의 주창자들을 믿도록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중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민중의 순수하고 흠없는 표현을 찾아서 해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는 중세와 중세 문화에 대해 매우 단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모든 움직임들은 웃고 있는 민중들의 합창 앞에서 공연되었다.(물론 민중은 스스로가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참가자이다. 그러나,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 다른 차이점들은 별개로 하고 - 민중은 양면가치적인 웃음을 웃을 권리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중략>... 민중문화는 세계사의 각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 모든 시대에, 광장은 항상 존재하였던 것이다. <본문 721-722쪽>

* 오늘 처음으로 일독한 책에 대해 겁없이 리뷰를 올리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에 대해선 별을 다섯 밖에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울 만큰 전공자들이 큰 공을 들여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바흐찐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단 분량면에서 독자를 압도한다. 필자 연보와 옮긴이 후기 등까지 포함하면 거의 800쪽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와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되 "엄숙"해지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