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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여영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국내 번역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텍스트를 일일이 손글씨 작업하였다. 원본과 비교해가면서 꼼꼼하게 최대한 원본의 손글씨 느낌을 한글로 되살려 놓은 수고에 우선 박수를. (손글씨- 정은규)
미메시스는 정말 이런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다른 출판사도 이런 부분은 좀 배웠으면...
(물론 결국은 시간과 돈 문제겠지만, 그 때문에 책의 가치가 올라가고 독자 역시 알아보니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작가 크레이그 톰슴의 자전적 이야기다. 미국에서 2003년에 이 책이 출간되었으니 1975년생인 작가에게 이 창작 과정은 20대가 끝나갈 무렵, 자신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어린 시절과 10대의 성장통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치유 같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담요>는 먼저 사랑 이야기다. 첫사랑, 한 겨울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담요 같았던 청춘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한 사람의 마음에, 그의 선택과 관계 없이 자리 잡은 죄책감과 '속죄'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처럼 늘 따라다니는 종교의 그림자에서 그가 어떻게 벗어나고 성장해나가는 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겪은 하나의 성장담이 종교와 가족, 그리고 첫사랑의 이야기가 맞물려 정서적으로 펼쳐진다.
"어린 애인 내눈에 비친 삶은 너무나 끔찍했기에 난 틈만 나면 좀 더 살기 편한 곳으로 도망가는 꿈을 꾸었다."
보수적인 기독교 부모와 공동체 속에서 성장한 소년의 과거는 밝지 않았다. 그에게 끔찍한 과거의 탈출구는 꿈나라와 그림 뿐이었다.
그렇지만 크레이그 톰슨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특유의 따뜻한 시선은 거두지 않는다.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은 순수한 감성을 그대로 전달한다. 분명 무거운 이야기지만, 따뜻한 정서가 느껴진다. 작가의 부드럽지만 어른스러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죄책감을 읽는 이에게 까지 줄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 한 것 같다.
"하나님, 죄송해요"
어린시절 백지 같은 아이에게 종교가 심어준 세계관은 그에게 있어 구원이기 보다는 죄책감이다.
10대시절, 그 것을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사랑이었다. 바로 고등학교 성경캠프에서 만난 레이나.
그에게 그녀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서, 하나의 뮤즈가 된다.
하늘 위에 있던 신이 지상의 신이 되어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 역시 그에게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 같은 시기를 보내고, 그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 책에서 두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첫번째, 어린시절 종교심이 충만하던 때, 신 때문에 자신이 예전에 그린 그림을 불지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 신은 이후 뮤즈(레이나)로 대체된다.
이후 스무살, 그는 또 다시 레이나와 함께 한 기억들을 편지, 사진들과 함께 모두 불에 태워버린다. 단 그녀가 준 담요만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이 두 '불'을 거친 후, 그리고 그는 스무살 생일 후에 독립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찾아 나간다. 집을 떠나 더 큰 세계를 만나면서 어린시절 부터 자신을 옭아매었던 종교에 대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회의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성장기를 거친 바 있어 공감을 많이 하면서 읽었다. 종교적 죄책감과 사랑에 대한 부분들은 나의 과거와 비록 내용은 다르지만 어떤 경험의 질이나 성격이 비슷해 많은 부분 공감했다.
책 제목이 '담요'인데, 책에서 담요 역시 두 가지가 등장한다.
어린시절 좁은 침대에서 덮고 자던 담요와, 레이나가 선물해주고 같이 덮던 담요가 그것이다.
좁은 다락방에서 끔찍하게 보낸 어린 시절이었지만 동생과 함께 덮던 담요는 자신을 덮혀주고 꿈을 꾸게 해준 담요다. 이 담요는 순수이자 추억이 밴 물건이다.
사춘기가 시작되고 레이나와 함께 한 위스콘신의 겨울 담요는 첫사랑 그 자체다.
그를 구원한 건 하늘 위의 아름다움도, 타인의 아름다움도 아닌
자신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일종의 동경이나 숭배같은 레이나를 떠나 보내고 진짜 '첫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픽 노블로서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작품 속 주된 소재인 담요가 주는 정서적 느낌이 작품 내내 살아있다. 겨울, 눈 등 배경과 잘 어우러져 한편으로는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자전적 성장담과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데도, 전편에서 일관되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그래픽노블이다.
특히 글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섬세한 감정이나 분위기를 그림과 이미지로 전달하는 부분은 탁월하다.
"무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는 눈속에서는 공간감도 깊이감도 모두 사라진다" 같은 내용을 담은 장면들은 단순하지만 참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꼭 그 속에 있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개인이 겪은 어떤 한 시기 삶을 타인이 예술작품을 통해 온전히 같이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가장 위대한 여행은 한 사람의 내부로 들어가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
레이나 가족 중 로라와 오빠 벤이 나오는 장면은 너무 좋다.
로라와 벤의 그림은 정말 사랑스럽다. ^_^
로라의 부모가 입양한 벤과 로라는 각각 다운증후군과 지적장애를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