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쪼알 > 황현산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보들레르의 시들, 그리고 예술가의 혼
번역가 황현산 선생님의 신간 <파리의 우울> 출간에 맞추어, 문학동네와 주한프랑스대사관이 주최하고 후원한 <보들레르 낭독의 밤>에 다녀왔다.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국문학 전공자라 프랑스 문학에는 무지하기도 하고, 이참에 보들레르라는 지성사에 오래 남을 그 이름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계기를 만들고 싶기도 했다. 평소에는 이런 낭독의 밤에 친구와 같이 가기를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혼자 가고 싶어 혼자만 신청하였다. 시는 등 따뜻하고 배부른 자의 것이 아니라고 했던 예전 은사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파리의 우울>이라는 제목에 맞도록 보들레르의 글을 고독하게 받아들이고 또 읽고 싶었다.
황현산 선생님의 낭독은 그윽하고 진지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일찍이 시인이 자기 자신의 시를 읽을 때의 아름다움은 본 적이 있으나, 번역가가 자신이 번역한 시를 읽으며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한 문장 한 문장 공을 들여 번역하셨다는 것을 그 시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산문시라 더욱 이해하기 난해하겠구나, 걱정했던 것은 잠시. 황현산 선생님께서는 그(보들레르)가 인간의 유한함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감각을 통해서 인생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을 음성으로, 또 표정으로 말씀해 주셨다. 시를 낭독할 때면 앉아 계시다가도 일어나 읽어주시는 면이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프랑스어 원문을 읽어주시는 여자분 발음도 유려하여,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프랑스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감명받았던 시는 아래의 <창문들>이라는 시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좋은 글을 낭독하면, 내면에 어떤 문이 열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을 짧은 섬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렵기만 했던 보들레르가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황현산 선생님께서 해주신 낭독의 힘을 자명하게 느꼈다. 이 낭독의 밤에 참여할 수 있어서, 알라딘과 문학동네, 그리고 황현산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마음껏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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