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의 생애 전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신념을 지녔는지,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찾아보는 게 중요하다. 위인전은 대개 업적 위주의 서사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생략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이다. 5만원권이 등장하기 이전에 만원짜리는 가장 고액의 지폐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종을 사랑하는 이유는 한글 창제와 고른 인재등용 등으로 많은 성과를 낸데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당대 사람들에게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은 기록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노비제를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조선 중기에 양반집에 20~100여명의 노비가 있었는데 인구의 40퍼센트 정도로 추산한다. 이들이 사실상 국가 경제를 부양했다는게 팩트이다. 세종은 제도적으로 노비의 숫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원칙적으로 해방될 수 없고, 아버지가 양반이어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 되었으며, 기녀의 신분 또한 자식에게 세습되었다. 법적인 권리 또한 박탈당했던 그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신분제 사회 조선의 끔찍한 이면이다.

한글의 창제에 관해서도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중국어의 중심이 바뀌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발음기호라고 한다. 이 부분은 주장이 담긴 책을 다시 읽어보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조선에 대한 이미지가 어디까지 환상일지 궁금해진다.

나는 조선 노비제의 확립에 있어서 1422년의 노비고소금지법 제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노예의 진정한 요건은 법 능력의 상실에 있다. 이를 가리켜 올란도 패터슨은 ‘사회적 죽음‘이라 하였다. 노예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맞설 권리가 없고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를 상실한 상태가 어느 인간이 노예인 바의 본질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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