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부터 심장에 돌을 얹은 것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끝까지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원하지 않는 두번의 출산과 낙인,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도구처럼 다뤄진 셀리의 삶에 할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2022년의 독자에게는 기이한 삶이지만, 불과 100년전인 1922년도의 우리나라의 여성들의 삶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셀리가 겪는 곤란함은 단순히 흑인 여성의 삶에만 해당는 불편함이 아닌 것 같다. 약자의 키워드는 무수히 많고 어떤 것도 이 자리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파워게임 아니겠는가. 인종, 외모, 지위, 권력, 돈, 나이 등에 차이로 수평적인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할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묘사가 디테일한 소설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운을 남긴다. 수동적인 셀리의 삶과 비교되는 슈그와 소피아의 삶이 인상적이었다. 타고난 매력으로 당당한 슈그의 모습과 투쟁으로 쟁취해나가는 소피아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았다. 현실을 생각할 때 소피아처럼 싸우기에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그 점이 안타깝고 화가난다.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봤는데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흥미로웠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디테일하게 그려준 부분에 대해서 만족했고, 엔딩에 대해서는 다른 후기들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영화도 같이 보기를 추천한다.

질문1. OO씨는 왜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되었나?
ㅡ셀리에겐 그는 누구이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버트는 우선 보모가 필요했고,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부인이 필요했다. 마음은 슈그에게 가있는 껍데기인 남편은 셀리가 사는 곳을 바꾸었을 뿐이다. 대체될 수 있는 힘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질문2. 셀리의 편지에서 수신인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ㅡ신과 인간의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라면, 자매의 관계는 수평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셀리의 수신인으로서의 하나님은 권력의 프레임을 입고 있었다. 네티의 편지를 발견하고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동안의 착각을 하나씩 허물어가며 기존의 관념을 부정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신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것이 옳은 것인지 질문하고 따져보게 됐다는 의미이다. 누군가의 그림자처럼만 살아왔던 셀리의 삶에 슈그가 등장하면서 인격적인 자아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어떠한 모습이건 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질문3. 진짜 여성주의란?
ㅡ여성도 동등한 욕구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주로 누군가의 조력자로 인식되온 기존의 모습과는 다르다. 일방적으로 참기를 강요받는 모습과는 반대되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소피아의 모습에서 우머니즘의 의미를 찾아본다.

책 <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의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시가의 법칙‘, 그리고 책 <B급 며느리>에서 언급된 ‘비겁한 평화‘가 떠올랐다. 대체로 약자인 한쪽이 참아야 하고, 불합리적인 일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강자의 언어다.

나아지고 싶다면 우리 모두 어디선가부터 시작을 해야 하고,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건 결국 우리 자신이에요.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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