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한트케의 <소망없는 불행>이 어머니의 삶을 회고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는 딸의 이야기이다. 감정이 도드라지지 않고 건조하게 쓴 글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느껴진다. 다만 <소망없는 불행>이 어머니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와 딸이 살아가는 세계의 차이에 주목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농가에서 살았다. 무학자였고 겨우 셈을 할 줄 알았다. 그런 할아버지 아래에서 잠시 학교를 다니며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나 초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했다. 빈둥댄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농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답습한 삶을 살아냈고 자녀들이 부지런하게 살며 현실에 만족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딸이 사범학교에 들어가 받는 혜택들을 보며 자신이 비난했던 다른 세계에 속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자부심을 느꼈던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시대의 한계로 익숙한 삶 이상을 꿈꾸지 못했다. 그 벽을 뛰어넘으려는 자녀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고, 불안했으며, 한편으로는 질투했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의 틀안에 가두어두지 않아서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아버지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하고자하는 욕구와 사고의 틀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된다.

스무 살이 넘은 처녀가 아직도 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상황을,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이상하고도 비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는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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