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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변종모의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를 받은 날밤, 자기 전에 난 독서 계획을 짰다. 내일 후딱 읽고 필사 하고 서평까지 써버리면 되겠다. 한두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겠지,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튀어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소설만 읽으려 들었던 독서 편식이 편견을 만들었다. 여행에세이란 사진 왕창에 글 조금 여백 많이, 라는 착각. 그래서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빼곡한 이야기들로 인한 혼돈과 스스로의 무지로 인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쫓기듯 달력을 꺼냈다. 계획을 수정했다. 이 책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북밴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변종모의 여행이야기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어쩌면 나라가 아닌 음식이 하나의 카테고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는 힝카리 만둣국과 함께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를 떠올리는 것처럼 과일 물김치와 길기트가, 야자 열매와 웰리가마의 미리사 해변, 피자와 인도 방갈로르, 짜이와 갠지스 강이 짝지어 생각이 날 것이다. 하필 음식일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곧 그만큼 부질없는 질문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에서건 삶에서건 가장 중요한 일이 먹는 일 아닌가. 우리는 밥 한 끼를 함께 먹는 행위를 통해 이전보다 서로를 더 친밀하게 느끼곤 하지 않은가. 불편한 사람과는 콩 한쪽도 함께 먹길 꺼린다. 식사는 서로에게 닿는 가장 진솔한 소통방법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도 마음을 부르게 채우며 계속 여행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랬기에 도달하는 모든 곳에서 달달한 추억들을 채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행지의 모든 이야기가 낯섦을 전제로 하기에 책으로 접하는 입장에서는 새롭고 재미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변종모의 이야기는 진솔해서 더 좋았다. 여행자이기에 갖게 되는 반성의 마음이나 여유 같은 것도 좋았지만 디아를 파는 소녀의 소원을 함께 빌어주는 마음이나 짧지만 진정이었던 그의 사랑이 좋았다. 유별나게 맛 좋았던 짜이의 실체를 알고 주춤하는 것도 그럼에도 스스로의 마음 탓이라는 걸 깨닫고 결국 이전처럼 마셔버리는 모습도 더 없이 좋았다. 멋있게 자신을 포장하려 들지 않고 아는 체하며 거들먹거리지 않아서 그의 여행담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더하여 순간을 완벽히 담은 사진들도 인상 깊었다. 그가 지나간 여행지의 맛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준 것 같았다. 취향에 맞는 사진들에 포스트잇을 붙여놨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죄다 검은색이었다는 웃지 못 할 후일담도 남겨줬다.
만두가 끓어오르는 수증기에서 냄새가 났다. 따뜻한 냄새. 이미 지나간 일들의 냄새라서 따뜻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저마다 살아온 수많은 사연이 보글보글 끓는 수증기처럼 팽창해, 어느 날 그 아픔들도 기억 속에서 환하고 따뜻하게 끓어오르리란 것을 안다. 추억이란 잡히지 않는 실체이지만, 이렇게 열렬하게 끓어오르는 수증기처럼 분명 서로의 입김이 맞닿아 그려내는 이야기이므로 그것이 향긋하다 생각한다. 지나간 일이므로 아픔은 웬만큼 증발되었을 것이다. 이제 뚜껑을 열고 한 김 식힌 다음, 좋은 생각만 하면서 꿀꺽 삼키고 나면 과거는 사라지고 다시 미래만 남을 것이다. 그 든든한 포만감으로 나는 또 남은 길을 가리라. 내게, 늘 당신과의 추억은 허기지지 않다. 40p
변종모의 이야기엔 요리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많았다. 마치 밥을 짓듯 글도 짓는 것 같다. 국을 우리듯 마음을 우려내고 향을 음미하듯 삶을 음미하고. 만남과 헤어짐은 절대 면역되지 않는다던, 그 마음을 다스리려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던 그는 지금 어디쯤을 여행하고 있을지. 이상하게도 지금 나는 배가 잔뜩 부르다. 그의 이야기를 타고 그의 여행을 따라 다녀온 것뿐인데 포만감에 빠졌다. 입맛이 참 달다.
-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