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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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때로는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기쁨의 순간이 있었고, 때로는 내게서 빨리 떠나기를 바랐던 슬픔의 나날이 있었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나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렀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이젠 알겠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들일 뿐이니, 매일 저녁이면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환한 등을 내걸 수 있으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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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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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누군가는 작별하지 않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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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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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4일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 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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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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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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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왼손으로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파노라마 무한하게

그날은 몹시도 눈이 내렸는데
내려앉는 눈송이를 볼 수 없는 높은 침상이었는데
침상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밤이었는데

죽기 직전 사람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한눈에 다 보다고 하는데
그것은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무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움직임이라고 하는데

그때 보이지 않는 창 너머로 보았던 것은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주던 얼굴이었는데

걷고 묻고 달리고 울고 웃던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있지도 않은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없지도 않은 있는 사람을 지울 때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채우고 싶다고
더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위에서 아래로 과거에서 미래로
아득히 흘러가던 그 풍경은 다 무엇이었을까

흙은 또 이토록 낮은 곳에 있어
무언가 돌아가기에 참으로 좋은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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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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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는 것, 화가들을 많이 알고, 토요일과 선인장 꽃을 좋아한다는 것...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깊어지고, 서로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때쯤 그녀는 사라졌고 시간이 흘러서야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잘 지내셨나요? 정말 미안해요. 어떤 말로도 지금의 저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겠어요... 그래요. 저는 당신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저의 어둠에 관한 이야기에요. 저는 이렇게 태어났어요. 어떤 기회도 어떤 노력도 할 수 없었어요. 세상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저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들의 장애를 인정해주니까요.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해주지도 않으면서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 낸 장애인입니다. 그렇게 저는 마음속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도려낸 여자로 성장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입니다.
모두의 수군거림의 대상인 저의 손을 잡아주던 당신의 손을 저는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나라는 여자에게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결국 무릎 꿇은 것이죠.
이런 얼굴로 태어난 여자지만 저의 마지막 얼굴은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얼굴일 거예요. 그리고 끝으로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작가는 이 소설을 여자들에게 유독 엄격한 미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 사회에서 상처받고 외면당한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가 아주 못생긴 여자라면...
그래도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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