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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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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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왼손으로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파노라마 무한하게

그날은 몹시도 눈이 내렸는데
내려앉는 눈송이를 볼 수 없는 높은 침상이었는데
침상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밤이었는데

죽기 직전 사람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한눈에 다 보다고 하는데
그것은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무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움직임이라고 하는데

그때 보이지 않는 창 너머로 보았던 것은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주던 얼굴이었는데

걷고 묻고 달리고 울고 웃던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있지도 않은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없지도 않은 있는 사람을 지울 때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채우고 싶다고
더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위에서 아래로 과거에서 미래로
아득히 흘러가던 그 풍경은 다 무엇이었을까

흙은 또 이토록 낮은 곳에 있어
무언가 돌아가기에 참으로 좋은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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