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 상처 준 어른들 그리고 절대 감춰질 수 없는 기억

 

시간이 약이라는 말, 무조건 잊으라는 말. 사람들이 너무 쉽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피해자는 두 번 상처받는다.(한때 유행어였던 그야말로 두 번 죽이는 거다.)

<그랑 주떼>속의 어른이라는 사람들도 한 여자아이에게 두 번 상처 줬다. 절대 괜찮지 않은데 가해자인 자기자식을 보호하기위해 친딸처럼 예뻐하던 조카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 나서야 괜찮다고 얼버무렸던 고모,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다가가서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하더니 뒤에서는 수군거리던 동네 아줌마들, 아이보다 훨씬 큰 남자어른에게 피해를 당한 딸을 보듬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창피하다며 때리고 혼낸 엄마.

 

[이런 나에게 예쁘고 아름다운 발레 선생님이 다가와 발이커서 좋겠다.”라고 말해 준 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16]

학창시절에 끊임없이 따돌림을 당하고 늘 수그러들었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긍정적인 말을 해준 발레 선생님은 예정의 구세주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숨기고만 싶었던 큰 발을 무용원에서 만큼은 자신 있게 펼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 바보, 돌대가리, 병신, 미친년, 못생긴 게 등등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들었지만 하얀 피부만큼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마 혹은 얼굴에 여드름이 돋기 시작하면 감자, 요플레, 알로에 마사지를 하며 피부에 엄청 집착했었다. 그리고 선생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일이 드물었던 나에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1, 2학년 때 담임선생님(2년 연속 같은 분이었다.)이 두 분이 공통적으로 나를 칭찬한건 글쓰기였다(정확하게는 일기를 잘 쓴다는 칭찬이었다.). 그래서 내가 글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힘이 없다. 무언가를 똑바로 해내거나 이겨낼 수 있는 힘, 제대로 말하거나 알아들을 수 있는 힘 같은 것들이 매우 약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언가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렵고, 알아듣기 어렵고, 바라보기 어렵다. 57]

성폭력은 성인 어른들도 똑바로 이겨내기 힘든 일이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같은 여자라는 사람들도 피해자의 편이 되어주기는커녕 죄인취급하기 바쁘다. 피해자가 여자어른이든지, 어린여자아이든지……. 예정은 그런 어리석은 어른들 때문에 자신을 때리는 엄마의 손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잘못했다고 빌었고, 고모의 말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나를 괴롭힐 때 짝꿍의 악마 같은 얼굴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를 대할 때의 그 천사 같은 얼굴이 더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 아니라고, 내 짝꿍은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있다고 어른들에게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내 말을 진짜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72]

단 한사람이라도 아이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었더라면 파렴치한 남자어른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이었는지(남자아이들의 행동에는 관대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에게 남자 짝이 때린다. 혹은 학교에서 남자애들이 놀린다. 라고 말하면 남자애들은 좋으면 그래.”혹은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래.”라고 가볍게 말하곤 했다. 내가 좋은데 왜 그래요?”라고 되물으면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거야.”라고 또 가볍게 말했다. 다행이도 내 엄마는 학교에 찾아와서 나를 때리는 남자 짝을 혼내주곤 했지만 어린 예정의 부모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딸아이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고 보호해주었더라면 어린 예정은 학교에서 뛰쳐나가다 나쁜 아저씨를 만나 무서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세상에는 백퍼센트 완전히 감춰지는 기억은 없다. 특히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더더욱 그렇다. 당장은 잊은 것 같지만 그 기억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나를 약 올리듯 뛰쳐나온다. 발레강사를 하면서 여자아이에게 발레복으로 갈아입혀주다가 성폭력의 기억이 떠오른 예정처럼 말이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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