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쪽
마르셀 서루 지음, 조영학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 사월의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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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기 직전에는 정말 온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 든다. 신체 장기들이 작동을 멈추면서 심장이 뜨거운 피를 살갗을 향해 모조리 뿜어대기 때문이다. 간이 꽁꽁 얼어가는 와중에 옷을 잡아 뜯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30)

나약함과 양심 그리고 선한 믿음은 자동피아노와 같다. 딜런시의 무기고에 부관해둔 책들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더 이상 설 자리 없는 무용지물들. 하지만 내가 쓰레기나 먹고, 주저 없이 살인을 하고, 춤을 추거나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갈망까지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31)

우리는 모두 사막에 버려졌으며, 우리는 혼자이고 예외 없이 죽는다. (94)

돌은 우리 집의 어떤 물건과도 같지 않았다. 아니, 마을 전체와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반반하고 부드러운 데다 사람 손이 간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씨앗에서 자란 식물처럼 완벽하다고 해야겠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돌은 어머니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와 살기 위해 뒤에 남겨두어야 했던 삶의 편린들. (112)

미래의 분들께. 전 러시아 폴린에서 태어났고 지금 열여덟 살이랍니다. 여기 제 삶과 저 자신을 담았어요.
여기 제 삶을 담았어요. 저 자신을 담았어요.
샴수딘이 그 말을 전하는데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내가 본 곳은 삶을 소거한 도시의 껍데기뿐이었건만. (249)

내가 옮기는 단어 중에는 한 번도 귀로 들어보지 못한 종류도 많다. 덕분에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단어가 만인의 두려움 이면에 박혀 있는지 정도는 안다. (249)

사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두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굶주림, 추위, 질병은 두려워할 수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나를 집어삼킨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말을 들으며 난 마침내 그 순간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난 소멸이 무서워요. (249-250)

해협 때문에 겨울은 정말 지독하게 추웠어. 해안의 바닷물이 어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는군. 난 외눈으로 알래스카 쪽을 보고 있었는데 너무도 비현실적이더라고. 바다는 그림처럼 평평한데 온통 안개와 모래와 잿빛 물뿐이었지. 그때 신을 향해 이렇게 맹세했지. 저곳에 갈 수만 있다면 평생 신의 종복이 되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288)

언제낙 그간 구해낸 책을 세어보았다. 무기고에 쌓아둔 책이 2,075권, 집 안에 있는 책이 177권이었다. 샤를로의 옛 침실에는 양초 16박스도 쟁여두었다. 박스 당 한 다스씩이었고 심지를 짧게 유지한다면 두 시간 이상은 태울 수 있는 양초였다. 한 박스면 열이틀은 계속 밤을 밝힐 수 있으므로 다 합치면 6개월치가 넘는다.
게다가 여름에 불을 밝힐 이유는 거의 없다. 6월이면 촛불 없이도 한밤중에 책을 읽을 수 있다. 하기야 책을 누가 읽겠는가. 책은 언제든 머리만 아프게 만든다.
촛불에 대한 요점은 이렇다. 조만간 양초를 더 뒤져볼 참이다. 당장 찾아낼 자신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더 이상 약탈할 곳도 없고 양초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심지도 사라지고 두고 온 영혼의 단지들도 사라지리라.
그렇게 되면 추크치족처럼 고래기름 등불을 만들거나 아님녀 어둠 속에서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이 도시에는 더 이상 찾아낼 생명도 없다. (315)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코딱지만큼도 없다. 내 장례식에 올 필요도 없다. 다만 그대들한테 남겨줄 세상에 대해선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어린 시절과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을 그대들의 어린 시절. 그 문제에 대해선 정말로, 정말로 유감이다. (318)

하지만 그대들에게 남겨줄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바로 그대들 자신의 백지일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구해낸 여타의 책들과 함께 남겨둘 생각이다. 기억의 돌처럼 말이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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