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브루 별 헤는 밤 디카페인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카페인이라서 주문해봤다. 오트밀크에 섞어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속 쓰려서 커피 못 마실 때는 디카페인이 최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당근으로 물건 하나를 판매했다. 내가 쓰던 물건이 아니라 부모님이 쓰시던 건데 이제 쓸 일이 없다 하셔서 내가 대신 당근에 올렸다. 안 팔릴 줄 알았는데 웬걸, 바로 연락이 왔다. 에누리 가능하냐고 물어보시길래(가격제안 가능하다고 올려놨음) 쿨하게 깎아드렸고 그분께서 구입하시기로 했다. 그제서야 물건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약간 더러웠다. 구매자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엄마랑 나랑 들러붙어서 그거 세척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둘이 앉아서 대화 한 마디 없이 묵은때를 벗기던 그 장면이 왤케 웃기던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또 한 번 몸으로 느꼈다. 물건은 사는 것보다 처분하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구입은 쉽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까지 날아오니까. 그런데 물건을 처분할 때는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특히 나처럼 물건을 아무렇게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면 더 그렇다. 이꼴저꼴 안 보고 분리수거로 내버리면 편한데 멀쩡한 물건을 그렇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당근으로 판매 혹은 나눔하려고 노력한다. 


며칠 전에는 부모님댁 주방 정리를 도와드렸는데 너무너무 멀쩡한 스텐 냄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 개는 분리수거로 버렸고, 쓸 만한 것들은 당근으로 나눔했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연락오는 걸 보고 '그래, 안 버리기를 잘 했다. 버렸으면 고철인데 나눔하니까 물건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거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뿌듯했다. 이런 뿌듯함 때문에 당근 나눔을 애용하는 편이긴 한데....그래도 너무 귀찮다. 물건 상태 확인하고, 사진 찍고, 설명 올리고, 모르는 사람이랑 채팅하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귀찮다!!!!


예전에 언니 집에 갔을 때 언니가 자기 집에 당근으로 팔 물건이 산더미라면서 나보고 당근 거래 해주면 용돈 주겠다고 했었는데ㅋㅋㅋㅋㅋㅋ그때 언니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 당근 하다보면 기가 너무 빨린다. 진상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오히려 친절한 분들만 만났는데도, 그 행위 자체가 너무 피곤하다ㅋㅋㅋ. 요즘 부모님댁 정리를 도와드리면서 당근을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민한다. 당근 할까? 귀찮은데 분리수거로 버릴까? 아까운데 그냥 쓸까? 아니 그래도 당근해야지ㅠㅠ.


나의 결론은 하나다. 물건을 구입할 때 신중하게 생각할 것.


나는 물건 살 때마다 처분 방법을 고민한다. 옷을 살 때는 이걸 사서 실컷 입고 나중에 헌옷수거함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금액대의 옷들만 구입한다. 디자이너 브랜드나 백화점 옷들을 쳐다도 보지 않는 이유다. 전자제품은 최대한 구입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고, 사더라도 무조건 소형을 선호한다. 냉장고도 작은 거, 세탁기도 작은 게 좋다. 크기가 작으니까 팔기에도 좋고, 안 팔려서 폐기물 스티커 붙여서 버려야 하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옮길 수 있으니까 좋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부모님댁 베란다에서 겁나게 무거운 대리석 식탁 상판을 발견했다. 15년 전쯤에, 대리석 식탁 한창 유행할 때 100만 원도 넘게 주고 산 거라는데 지금은 베란다 구석에 쳐박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 두 분이 쓰시기에는 너무 크고,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빌트인 되어 있는 아일랜드 식탁을 쓰다보니 그 대리석 식탁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제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슬쩍 꺼내봤는데 꿈쩍도 안 했다. 진짜 겁나게 무거웠다. 대리석 대리석 말만 들어봤지 이렇게 큰 대리석 식탁을 옮겨본 적이 없으니 대리석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몰랐었다. 대리석은 정말이지 겁이 나게 무거웠다. 여자 둘이 미친듯이 힘을 쓰면 한 3cm 움직인다.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하던 참에 '빼기' 어플이 생각났다. 무거운 물건을 집에서 밖으로 옮겨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한 게 생각나서다. 그 어플에서 식탁 상판 선택하니까 대충 52,000원이 떴다ㅋㅋㅋㅋ. 100만 원 넘는 대리석 식탁 상판 버리는 것도 열 받는데 돈을 오만 원이나 또 내야 하다니?!!!! 물건은 정말이지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문제다...


내 돈 주고 버리기는 싫어서 당근 나눔으로 올렸다. 곧바로 연락이 왔다. '진짜 대리석이에요?'라고 물으시길래 대리석 맞다고 답했다. 그 분은 다음날 우리집에 방문했다. 나는 없고 엄마만 있었는데 그 분이 식탁 상판 보자마자 '이거 대리석 아니에요. 겉에만 대리석이고 안에는 시멘트예요.'라고 했다고 한다ㅋㅋㅋㅋ. 그래도 가져가시기는 했다고.


나는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식탁 상판이 겁나게 좋은 대리석이라서 일부러 페이크를 치기 위해 이게 사실은 시멘트라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 혹은 식탁을 판매한 회사가 우리를 속이고 대리석을 입힌 시멘트를 팔았을 가능성.(우리는 15년 동안 그게 진짜 대리석이라고 알고 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그게 나쁜 대리석이든 좋은 대리석이든 무조건 처분하려고 했기 때문에 굳이 그 분이 거짓말을 해서까지 후려쳐서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0만 원을 주고 대리석을 입힌 시멘트를 샀고 그 무거운 걸 15년 동안 이고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한테는 이 이야기가 도시괴담보다 더 무섭다.


이번에 당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선물해서는 안 된다. 가장 처치곤란한 물건 투탑 중 하나가 바로 선물받은 물건들이다.(나머지 하나는 멀쩡하다는 이유로 대책없이 주워온 물건들이다.) 특히 영양제랑 주류가 문제다. 얘네들은 당근으로 나눔도 안 된다. 그렇다고 못 먹는 영양제랑 주류를 입속으로 털어넣을 수도 없고 하수구에 버릴 수도 없어서 주변 지인들한테 연락해서 필요한 사람을 수소문하고는 있는데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꼭 물어본다. 요즘에는 카톡 선물하기에 찜 기능이 있어서 그거 보고 선물해주기도 한다. 내 인생에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고, 서프라이즈 선물 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래서 물건 쌓이는 거 싫어하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약간 차갑고 정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미니멀리스트를 내가 싸잡아서 평가할 수는 없고, 나는 좀 차갑고 정 없는 편이 맞다ㅠㅠㅠㅠ.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생화여요...


아직도 당근에 올려야 할 수많은 물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 쓰면서 내일 문고리 거래 약속한 게 생각나서 얼른 문 밖에 내놨다. 인생 편하게 살 거면 다 버리면 되는데 버리기에는 너무 멀쩡한 물건들 때문에 나도 괴롭고 물건도 괴롭다. 지구의 환경은 행복할까...? 


내일도 당근 지옥은 계속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온갖 잡다한 이야기가 다 튀어나오는데 엄청 재밌다. 역시 빌 브라이슨! (전자책이 나오면 정말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편소설가 되기
존 가드너 지음, 임선근 옮김, 레이먼드 카버 서문 / 걷는책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빠와 나는 자주 다퉜다. 우리는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다. 아빠는 나에게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라고 말했다.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추구하지는 않을 거라고 답했다. 그런 인생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아빠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라고? 성공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앞으로 성공한 삶에서 행복을 느끼면 되는 거잖아!!!"


나도 그러고 싶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을 추구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진심으로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걸 어쩌나. 세상의 많은 불행은 자신의 욕망과 주변의 기대 사이의 불일치에서 나온다.


존 가드너의 <장편소설가 되기>는 장편소설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실용적인 조언을 주기 위해 쓰인 책이다. 나는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 전혀 없는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장편소설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는 먼 길을 택한 사람이라면 꽤나 공감하면서 읽을 만한 부분이 많았다.


작가란 끊임없이 쓰고 또 쓰고 그렇게 쓴 걸 수도 없이 고쳐쓰는 사람이다. 소설 쓰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힘겹고 지루한 작업을 견딜 수 있다. 장편소설가들의 기쁨과 슬픔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기쁨, 그리고 그것 말고는 어떠한 보상도 얻기가 어렵다는 슬픔. 


직업을 택할 때 좋아하는 것 말고 잘 하는 걸 하라는 조언이 있던데, 장편소설가들은 자신들이 이걸 잘 하는지 아닌지 확신을 얻기가 어렵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주변의 신뢰와 지지인데 소설가들은 이걸 얻기도 어렵다.


【의학 박사나 전기 공학자나 산림 경비원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청년에게 그 생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되고 시간과 지능의 낭비인지를 설명하는 선의의 충고가 곧장 쏟아지지는 않는다. "잘해봐라"라고 말해주고 속으론 의학 박사가 되기에 성적이 모자라면 접골사라도 되겠지, 할 뿐이다. 그런데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에게는 그의 친구, 친척, 직업 작가 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창작 교사들이나 창작에 관한 책들까지도 대뜸 성공하려면 각오해야 할 끔찍한 역경에 대해 지적질을 해댄다(그럼으로써 역경을 가중시킨다).】


존 가드너는 장편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기 확신이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쳐온 나는, 분명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정도 건사하지 못하고 사회적 의무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나아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는 생각심지어 여러 편의 소설이 채택됐는데도거의 무기력 상태에 이를 만큼 자학하는 젊은 작가들을 수없이 봐왔다. 거절 편지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고 부모의 부드러운 채근"자식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니?"ㅡ에도 아찔해진다. 오직 강인한 사람만이,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몇몇 사람의 응원에 힘입어 이 시기를 견딘다. 작가는 자신이 사실은 진지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진지함으로 기꺼이 큰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악의든 선의든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격을 피할 방법짓궂은 유머든 뭐든을 찾아야만 한다.


또한 막돼먹음의 미덕을 언급한다.


소설 쓰기에 충분한 기량을 갖춘 다음에는 한층 단단히 정신 무장을 해야 한다. 출판을 서두르기보다는 자신만의 문체를 공들여 보완하면서 소설 쓰기 기술을 천천히 신중하게 익히고 있자면 사람들이 그를 비딱하게 보기 시작하고 못 미덥다는 듯이 "대체 뭘 하는데?"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내내 빈둥거리고만 있는 거야? 네 강아지는 왜 그리 비쩍 말랐는데?"라는 뜻이다. 이럴 때 막돼먹음의 미덕이 요긴하다진지한 생활인의 자세 거부하기, 짓궂게 굴기, 툭하면 울기 같은 행태들. 취해서 울기는 닦달하려 드는 사람 퇴치에 효과 만점이다.


혹시 존 가드너가 나와 아빠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닐까.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에서 행복을 찾도록 하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반항했다. 


하지만 그렇게 막돼먹은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장편소설가들도 역시나 다방면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후 다섯 시면 일에서 해방되는 친구들과 당연히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처자식이 있으면 이웃들만큼 가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막연한 죄책감까지 느낀다. 안 느낀다면 소설가가 아니다.


이쯤되니 이 책은 장편소설 쓰기를 가르치려는 책인지, 세상과 불화하는 인간들에게 공감하고 위로하려는 책인지 헷갈린다. 아마도 둘 다이지 싶다. 


책 뒷부분에서는 출판사 구하기, 에이전트 구하기와 같은 비교적 실용적인 정보들이 있으나 현재의 소설가 지망생들이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미국의 정보인데다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판은 1983년에 출간되었다.


끝으로, 이 책이 좋았던 이유 한 가지 더. 이 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 때로는 수치심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면서, 자신의 작업을 좋아해주는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얹혀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순수한 동기에서 자기 작업을 기꺼이 밀어주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가인 그 또는 그녀는, 관습적인 도덕률을 떨치고 주의 은혜를 받들어 그의 권능 아래 사랑하는 이의 인자함에 값할 수 있도록 분골쇄신할 일이다.


존가드너, 장편소설가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던....)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엄마가 베란다 창고에서 커다란 박스 두 개를 꺼내왔는데 그 안에 일기장, 상장, 스케치북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그동안 이걸 버리지 않고 이고지고 다녔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쓴 일기장이 모두 남아 있었다.(초등학교 5,6학년 때 일기장이 없는 걸 보면 고학년 때는 일기 쓰기 숙제가 없었나보다.)


일기장을 대충 정리만 하고 집어넣었어야 했는데 나는 일기장을 열어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집정리 십계명 중 하나가 '추억의 물건은 절대 들춰보지 말 것'인데 나는 그 금기를 어겼다. 그리하며 어제 밤 늦게까지 초등학교 때 쓴 일기를 읽느라 늦게 잤다. 나름 힘들었고 나름 즐거웠던 초등학교 때의 내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와 단절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일기장을 보니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이나마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매니아였다. 이 프로그램의 첫 화가 방영하기 전에 예고편만 보고도 마음을 홀딱 뺏겼었는데 학교 걸스카우트 야영날이랑 딱 겹치는 바람에 첫 화를 본방으로 보지 못 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엄마한테 첫 화를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해달라고 부탁했고 야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1화를 봤다.


나는 혹시나 이 기억이 조작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911테러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당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전혀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 말이다.


나는 혹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를 집에서 본 게 아닐까, 걸스카우트 야영 때문에 첫 화를 못 봤다고 나 혼자 착각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일기장 안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일기에 걸스카우트 야영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그 날이 바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가 방영한 날이었다!!! 야영 때문에 토요 미스테리 극장을 챙겨보지 못 한 게 확실했다.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다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언니가 탕수육 먹다가 토한 사건도 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이건 내가 기억하는 사건은 아니고 언니가 기억하고 있는 일인데 내 일기장에 꽤나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깜놀했다. 이걸 내가 일기장에 적은 것도 기특하고 그 오래된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언니도 참 대단했다.


엄마가 창고에서 너덜너덜한 박스를 꺼냈을 때는 어우 저걸 왜 아직도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이러면서 살짝 싫어했는데 다 커서 일기장을 보니까 재밌긴 참 재밌다. 이래서 그 당시 선생님들이 일기 쓰라고 닦달을 했나 보다. 그것이 30년 후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재밌는 건 둘째 문제고,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낡아버린 일기장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 했다. 가장 좋은 건 사진 찍고 버리는 건데 수십 권의 일기장들을 반듯하게 펼쳐놓고 정갈하게 사진 찍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눈 딱 감고 버려 버리는 게 제일 좋은데 차마 그럴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쌓아두기에는 나의 미니멀리즘 성향이 견디지 못 한다. 아아아 괴롭다.


이래서 미니멀리즘 전문가들이 추억의 물건은 제일 마지막에 정리하라고 하는 거다. 추억의 물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정리 작업은 올 스톱이다. 지금 다른 것도 정리할 게 많은데 일기장 때문에 다른 것에 손도 못 대고 있다. 거실에 널어놓은 너덜너덜한 공책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유튜브 쇼츠만 보고 있는 거 실화인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d 2024-11-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 추억을 되살려주는 일기장에 관한 너무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Laika 님의 글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를 읽고 많은 분이 공감하고 추억 속에 잠길 것 같네요. 이런 좋은 글이 나오게 된 건 Laika 님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Laika 님의 어린 시절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 일기장,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또 들춰 보면 어떤 추억과 영감을 불러일으키겠죠. 저 같으면 못 버리겠어요. 종이로 된 기록이 디지털로 된 전자 문서 기록보다 훨씬 오래간다고 하죠. 감사합니다. 건필하시고요. ^^

2024-11-2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