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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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들은 환상을 부풀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걸세. 멋대로 부풀린 환상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게 될걸세."

___ p.196

 

 

 

허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생겨났다.

피부가 허물로 덮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

그래서 도시는 D 구역으로 그들을 격리하고 도심부에 커다란 방역센터를 세워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각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T 프로틴'을 만들어 공급하고, 그럼에도 허물에 점령당해버린 사람들은 방역센터에 입원해서 강제로 허물을 벗는다.

하지만 허물은 끝없이 다시 생겨난다.

그리고 허물을 가진 사람들은 허물 때문에 외면당하고, 격리되고,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그들에겐 이 재난 같은 질병으로부터의 완벽한 탈출을 꿈꿀 수 있는 '소망'이 필요했다.

그게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커다란 뱀 '롱롱'이라고 해도.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다.

하지만 산사태로 인해 사설 동물원이 무너지면서 그녀 또한 직장을 잃고 거리의 부랑자가 되었다.

허물로 인해 다시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다.

T 프로틴을 살 돈이 없으니 허물을 나날이 늘어가고 단단해져갔다.

참을 수 없는 가지러움과 고름과 피가 새어 나오는 허물을 짊어지고 사는 삶은 절망이었다.

결국 무성한 소문에 싸여있는 '방역센터'에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허물을 벗는 치료를 받으며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도시에는 전설이 있다.

'롱롱'이라는 뱀이 허물을 벗으면 그것을 본 사람들의 허물이 함께 벗겨지고 영원히 허물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아주 예전에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롱롱'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환상 속의 용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롱롱'만큼 큰 뱀을 보았다고 말하는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뱀을 잡으러 가서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보고 우리 모두 허물을 벗어던지자고 제안하는 다른 남자의 부추김을 받는다.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다.

그 뱀이 '롱롱'이든 아니든 그렇게 커다란 뱀이 있다면 그녀는 그 뱀을 살리고 싶었다.

 

방역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 그들은 또다시 허물이 자라기 시작하자 뱀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궁의 아궁이에서 만난 믿을 수없이 커다란 뱀, '롱롱'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 뱀을 그녀는 D 구역으로 데리고 온다.

허물을 벗을 수 있다는 1%의 희망만으로도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고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뒤에 숨겨진 진실들은 SF적인 거짓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어쩐지 현실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이런 사건이 우리 삶에서 정말 벌어지지 않을 환상 속 이야기이기만 할까?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편리함과 긴 수명을 보장해줬지만, 또한 우리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다.

무지한 사람들은 정부가 우리를 위해 배려할 때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과 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절망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이 아주 자그마한 희망과 호의에도 감동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우리의 희망을 이용해, 우리를 더한 절망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끔찍한 진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방역 센터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언제까지나 개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개발을 멈춰도 안되고, 개발에 성공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이 도시의 생산 동력은 시민들이 허물을 입고, 허물을 벗는 데서 나옵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이 도시는 생산 동력을 읽게 되는 겁니다."

___ p.153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 문장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책은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을 보여주면서도 소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절대적 희망이 아닌, 간절한 소망.

이루어질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은, 이루고 싶은, 꿈꾸고 싶은 소망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작은 바늘구멍이 모이고 모여, 이 잿빛 디스토피아를 찢고 나갈 수 있는 구멍의 시발점이 되어준다.

소망은 환상처럼 보이지만, 너무 작고 무력해 보이지만, 힘이 있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놓지 않는다면 어쩌면 소망의 끝에 희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무거움 속에 가벼움이, 사실 속에 환상이, 거짓 속에 진실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마지막에서도 환상 속 유토피아만을 보여주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답답한 진실을 묵묵히 던져주고 있어 더 믿음직했다.

현실이 무거울수록 환상은 더 거세지는 법이니까.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결국 환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좀 더 깨어 있어야겠다고,

좀 더 간절해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책이었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남겨졌으니까.

 

 

 

*** 독자에게 보내는 작가님의 친필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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