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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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책 후기를 빙자한 나의 페미니즘 이야기 -

학부 때 철학 책을 보며 이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느낀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하나가 미셸 푸코, 다른 하나가 주디스 버틀러다. 여성 없는 페미니즘, 그 사상을 주디스 버틀러와 내가 공유한다.

(1) 최근 누군가가 트랜스젠더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성 염색체 XX만이 여자라는 요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랜스젠더로 거의 유일한 하리수씨가 글을 썼다. 논리적 반박은 아니었고, 감정적 대응에 가까웠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트렌스젠더로 유명한 그녀의 그런 이야기가 내게는 정말 흥미로웠다.
아무튼, 이 사태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여성’이 누구냐의 문제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매우 헐거운 것이며 그 단어가 묶는 개체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이를 지워버린다고 말한다. 부자인 여자, 못 사는 여자, 공부 잘 한 여자, 운동 좋아하는 여자 등등, 이 모든 차이점들에도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여자라는 것을 단 번에 파악해서 분류하는 데 성공한다.
나는 그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져왔다. 내가 사회에 의해 여성이라고 규정되어 온 것은 맞다. 나도 꽤나 사회의 젠더 체계에 순응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의아했다. 예를 들어, 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한 성별만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불확정적인 세상을 살며 다들 자기 자신의 취향을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며 산다는 게 꽤나 신기했다. 나 스스로는 솔직히 말해서, 내 운명의 짝이 여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가지 더 붙여, 나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살고 있다. 내가 ‘여성’이라고 하던데, 별로 여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성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이중적인 감정을 갖는다. 어렸을 때부터 장군감이라느니 같은 소위 ‘남성적 기질’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불려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 같은’ 행동들과 여러 취향들을 스스로가 연습했다. 그게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반복적 행동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여자’라는 어떤 이상점(이데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해봤자 나는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조차 만들어진 관념물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여자’란 개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자’일 것이기 때문에. 그걸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으며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기질과 사회가 규정하는 여자라는 기질, 그 두 가지를 섞어 ‘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면, 일단 나는 나의 어떤 부분에서 여자를 ‘선택’한 것 같다.

(2) 페미니즘에 관해서 최근의 격렬한 논쟁들은, 아마 그것에 관해 갖는 상(image)가 모두 다 다른 것 같아 그럴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 관련해서 그 지향점은,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성별의 구분법조차 만들어 내어 우리를 관통하는 만들어진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 위계질서 안에서 남자와 여자 둘 다 내게는 다 같은 권력의 적용대상들이다. 그 위계질서가 남자와 여자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어떤 성별을 좋아할 것인지 정해주고, 어떻게 행동할지조차 규정하는 이 사회(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하면 남성성이 저하된다, 여자는 정치적 의견을 말하면 안 된다)에 다 적용된다. 우리는 모든 성별을 얽어매는 이 구분양상에 저항해야 하는 것, 어떤 한 가지 성별만이 아니라 섹스와 젠더를 규정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여자는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면 안 되며, 남자가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그 상황의 탈피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3)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생되는 문제는 ‘김치녀’와 ‘한남’이 같냐의 문제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남’을 ‘김치녀’와 같은 남성의 여성혐오 단어에 대항해서 나온 무기라고 인식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두 단어가 똑같이 다른 성별을 혐오하는 폭력적인 단어라고 인식한다. 이 두 지점의 위치가 극명해 균열의 소리도 크다.
일단 밝히고 싶은 지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내가 미러링 전략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패러디의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하는 차별과 혐오를 다른 맥락으로 전시하며,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성하는 힘을 준다면, 그것이 미러링 전략의 좋은 효과일 것이다. 두 번째 인정하는 지점은, 우리 사회의 기본 성별 위계질서가 특정 사회적 성별/젠더(여성, LGBT 등)에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성애 남성이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차지해온 위치는 분명 역사적인 것이며, 그것이 이성애 남성을 제외한 다른 젠더들에게 미쳐온 억압이 꽤나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젠더가 항상 ‘정상/적격’의 위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신분차별이 있던 옛날에 높은 신분에서 남성이 정치참여권을 가졌던 것 등)
그러나 현재 개인적으로 ‘김치녀’, ‘한남’, 이런 표현이 나에게는 다 똑같이 들린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서로 단어 남용 밖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래 기사의 일본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여성혐오 문화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미러링 mirroring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보면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언어를 빼앗아,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패러디는 물론 싸우는 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패러디를 하면 본인의 레벨을 상대의 레벨로 낮추게 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젠더간의 압도적인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미러링'은 적절한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남성들이 남발하는 반동적인 전략에 똑같이 휩쓸릴 수 있다."
심연을 바라보니, 심연이 자기가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성애 남성이라는 젠더가 인터넷에 폭력성을 과시하는 그 문제적 방식이 그대로 성별만 바꾸어 진행되고 있다. 내가 (2)에서 쓴 것처럼, 나는 성별의 구분법이 전 인간을 규제하는 사태의 탈피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미러링 전략이 나와 맞지 않아도, 서로의 젠더적 위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를 원했지만, 그 구분법의 벽만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가 보았을 때 이것은 폭력적인 성차별/분별의 끝없는 재생산일 뿐이며, 일베/김치녀 등의 그 끔찍한 문화의 아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유아인 사태에서도 나는 유아인이 처음에 달았던 댓글(애호박으로 때려준다는 농담)을 보며 그냥 왜 굳이 저런 표현을 썼지, 조금 부적절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대고 무차별적으로 ‘한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 놀랐다. 그 이후에 전개된 양상과는 별개로, 그 사건만 놓고 봤을 때, 그건 미러링이나 문제제기가 아니라, 폭력적이었다고 본다. 이게 조금만 진보적인 사람을 놓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보수적인 사람 두고 태극기 부대라 부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5) 항상 이 문제에 대해 슬프게 생각한다. 결국 ‘여성’이라는 정치적 집단이 대항할 지점은 똑같은 폭력이었던 것일까. 폭력과 혐오를 폭력과 혐오로 받아야만 사람들이 ‘봐주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이 ‘봐준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삼았으나, 이제는 현 양상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필연적 균열이 발생시키는 잡음이라 믿는다. 아래는 젠더 트러블의 일부분이다. 나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뿐 아니라 정체성 담론에서 젠더 트러블은 필독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라캉, 프로이트 비판도 시원했다. ㅎㅎ

「옮긴이 해제」
p20 따라서 선험적이거나 일반적인 ‘집합’이나 ‘범주’로서의 여성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재의미화와 재각인에 열려 있는 경합의 장소이며, 그 열린 의미화의 가능성이 급진적 정치성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인 것이다.

p21 그러나 보편 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 주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 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결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
p67 이 책의 요점은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p97 아마도 ‘섹스(본인 추가 설명 : 생물학적 성별)’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p100 이 ‘몸’도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이다.
p111 다시 말해 여성 범주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은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 다양성 안에 구체적 ‘여성들’의 배치가 구성되는데도 말이다.
p115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그 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이다.
p130~131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라캉 관련)
p179 “관찰에서 밝혀졌듯이 여성의 동성애 경향은 실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의 추구라는 측면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편의상 누가 관찰하고 무엇이 관찰되는가는 생략되어 있는데도, 라캉은 자신의 해석이 누구든 주의 깊게 본 사람에게는 명백히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관찰’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의 근원적인 실망이고, 여기서 이 실망은 가면을 통해 지배/해결된 거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강화된 이상화, 즉 욕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속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도 다소 ‘관찰’하게 된다.
p194 상징계는 인간 주체가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성으로 인간 주체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 라캉 이론은 일종의 ‘노예의 도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캉 이론은 어떻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보여준 통찰을 전유한 뒤 수정될 수 있었을까? 신, 즉 접근할 수 없는 상징계는 규칙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설정해주는 어떤 권력(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말이다. ... 실패를 보장하는 법의 구성은, ‘법’을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바로 그 생산적 권력을 부인하는, 노예의 도덕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프로이드 관련)
p202 다시 말해,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여성적 기질의 증거로 읽어내는가 말이다.

(다시)
p207-208 따라서 ‘기질’이라는 언어는 거짓 근본주의로서, 금지의 결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형성되거나 ‘고정’된다. 그 결과 기질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가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p231 이성애를 분명한 사회형식으로 온전히 보존하려면 인식 가능한 동성애 개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성애 개념의 금지 또한 필요하게 된다.
p265 푸코는 ‘섹스’를 기원보다는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는 역담론을 끌어온다. 그는 육체적 쾌락의 기원적이고 연속적인 원인이자 의미였던 ‘섹스’ 대신에 담론과 권력이라는 열려 있는 복합적인 역사체계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제안한다.
p307-308 성의 무한한 증식은 논리적으로 성의 부정 그 자체를 포함한다. 만약 성의 수가 존재하는 개체들의 수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성은 하나의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은 근본적으로 특이한 자질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유용하거나 기술 가능한 일반화로 작동될 수 없을 것이다.
p339 “영혼이 몸의 감옥이다.”(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인용)
p347 따라서 젠더는 규제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감추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p348 젠더의 행동은 반복된 연기를 필요로 한다.
p352 나의 주장은 ‘행위 뒤의 행위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가 자아의 행위를 통해서 구성된다는 실존주의적 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다.
p363 따라서 존재론은 하나의 토대가 아니라 규범적 명령이며, 이 명령은 자신을 필연적인 토대로서의 정치 담론으로 설정함으로써 음흉하게 작동한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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