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의 발견 (개정판) - 민주주의에서 정당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정치발전소 강의노트 2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굉장히 인상깊게, 그리고 잘 본 책이다. 저자가 한국정치에 관해 깊이 고찰해왔고, 현실적인 해법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심한 흔적이 잘 보인다.

요즘에 내가 정치학책을 읽다 보면 흐름을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정당을 강화하자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이야기다. 

두 가지 모두 내 눈에는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전자에 좀 더 쏠려 있다. 후자는 아직 대한민국의 풍토에서 약간 먼 듯한 느낌일 뿐만 아니라 설령 개개인이 직접민주주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결국 정당과 유사한 조직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될 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국가적 규모에서 우리는 제한된 정보에 접근하게 되고, 그 정보에 다른 이들보다 직업정신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정당인/정치인이라면 우리는 우리보다 관련 문제에 더 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정당이 필요 없을 정도라면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국민 하나하나가 정치인이 되는 수준, 즉 현재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처럼 추첨제따위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것일 듯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자는 이야기 이상으로 우리 모두가 정치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일까?

그런 문제에서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저자가 정당의 강화라는 문제를 시급하게 본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 역시 그게 현문제에서 가장 긴요한 해법이라고 본다. 있는 것부터 잘 꾸려놓아야 한다는 말에 포인트가 있다. 우리는 어쨌든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지형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들을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조직으로 가동시킬 필요는 있어 보인다. 또한 명사 위주가 아니라 정당이라는 조직을 통해 합리적이고 가시적인 아젠다를 제공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에도 강력히 동의한다. 카리스마나 매력 같은 개인의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인의 직업적 소명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네 정치인들은 대중에 너무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우습다. 대중들은 막상 중요한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결정권이 행사되었을 때 대중들에게 혜택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묘미랄까.

여러 가지 구절에서 동의를 많이 하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두 가지의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Q1. 저자는 민주주의가 꼭 정당이라는 중간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Q2. 직접민주주의의 확대가 정치의 신자유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당과 정치조직이 유사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의견에 크게 동의하는 바이긴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강화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가 확대되어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단정은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지역주의 조장에 대해서는 김대중 자서전 1권만 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대중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지역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는 없던 것이었는데 독재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동원되었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지역주의가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과 여러 비합리적 사회구조라는 근원적 문제점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에 백번 동의하는 바이다.


p17 어느 시대든 최선의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야말로 정치학의 최대 관심사였다. ... 스티븐 스미스 교수에 따르면, 그런 지식과 지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에로스Eros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좋은 사회구성체 내지 좋은 정치 공동체를 구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자유롭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에로틱한‘ 활동으로 여겼던 것인데, 현대 민주주의에서라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좋은 정당정치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추적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p44 권력과 통치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좋은 정치를 이룰 수는 없다. 그렇기에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과 통치를 선용하는 길을 찾는 데 있다. 권력도 통치도 없는 정치? 그건 망상일 뿐이다.

p140 어떤 것이든 참여와 의견을 형성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여가가 필요하다. 참여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시민의 의견은 직업, 소득, 교육, 연령 등 수많은 요소로부터 불평등한 영향을 받는다. 정당정치의 가치와 역할은 그런 불평등성을 완화하는 데 있다. ... 정당정치의 민주적 역할이 약할수록 상층 편향적이고 교육받은 중산층 중심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참여의 비용을 낮춰 주고 의견 및 대안 형성과 관련해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도록 잘 조직된 ‘강한 정당‘이 있어야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민주정치가 가능하다.

p331 정당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없이, 정당 후보라는 이름만 빌리고 실제로는 ‘개인 정치‘의 도구로 소속 정당을 활용하는 정치가들만 양산된다면, 민주정치의 미래는 없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정치를 직업이자 소명으로 삼은 사례는 단 두 경우 뿐이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등장했던 ‘데마고그‘로서 그 첫 번째 인물은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였다. 다른 하나는 현대 민주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정당 리더‘이다. 이 두경우를 빼고는 정치라는 일에 직업적 소명을 가졌던 예는 없다며, 베버는 군주정하에서 다양한 정치 보좌역을 했던 주교, 인문학자, 귀족, 양반 등에게 정치는 ‘부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정당 리더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위치를 갖는다는 것으로, 정당 리더를 거쳐 수상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정치도 사회도 좋아진다. 정당은 이제 인기가 없다며 개인 이미지나 네트워크형 시민 정치로 대통령이 되겠다면 ‘베를루스코니식 정치‘와 다를 바 없거나, 기껏해야 ‘착한 베를루슼니‘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p344 한국의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존재했던 지역감정이나 지역 정서, 지역 편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다. 옛날부터 있었다고 하는 지역색이나 편견 역시 정치적 필요 때문에 선별적으로 불러들여지고 작위적으로 변조되었을 뿐이다.

p374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는 그 나름 장점과 단점을 나눠 갖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례대표제를 선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단순다수제나 소선거구제를 마치 ‘문제의 근원‘ 내지 ‘악의 제도‘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단순다수제는 정치에서 지배적인 결정 방법이다.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원리 위에서 실천되며, 비례대표제하에서도 연립정부 형성이든 법안 통과든 최종적으로는 단순다수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더라도 약한 정당은 불리하다. ...누구든 자신의 표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를 바라며, ... 따라서 정당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고, 막연한 제도 효과에 의존해 정당정치를 바꾸고 좋게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일 때가 많다

p382 이런 정당 개혁론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직 및 공직 후보자 선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정당이 자율적으로 행사해야 할 그 권한은 민주주의에서라면 어느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당연히 그걸 달라는 국민도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국민, 시민은 정당들이 내세운 공직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보고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권자이다. 정당들이 책임 있게 공직 후보를 내보내지 않으면 시민 주권의 의미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해서 시민의 평가를 받아야 할 정당이 자신의 일을 시민에게 해 달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런 민주주의는 무슨 민주주의인가.

혹자는 시민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고자 정당 스스로 개방하겠다는데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시민의 의사를 모으는 일로만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선호와 의사를 모으는 것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에는 시장 원리가 더 낫고,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 손쉬운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 정당론‘이 바로 그런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접근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p393 정치는 옳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말해야 하는 분야이다. 성과를 내는 것은 선의만으로는 어려우며, 상황을 이해하고 이견과 대화하고 조정을 통해 가능성을 찾아가는 실력을 필요로 한다.

p406 정치적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인간적 선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적 시민들 모두 비극적 죽음을 가슴 아파하며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는 점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은 자신의 영혼만 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p416 정치는 좋은 사회구성체를 조형해 내는 과업을 통해 구성원 개개인이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 그래서 개개인들이 좀 더 풍부한 삶을 살 가능성을 향유하는 것, 그런 변화를 이끌고 그것이 시민 스스로의 자치라는 민주적 이상과 병행하게 하는 것, 이런 일을 민주정치라 할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런 일 만큼 가슴 뛰는 인간 활동도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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