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4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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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과제용으로 제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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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 개인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나온 문학적 결실 -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읽고

 

 

  필자는 이청준의「소문의 벽」을 한 문장, 두 문장 읽으면서 70년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소설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은 전형적으로 매우 잘 쓰인 중편소설이다. 처음에는 정체불명의 상태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한다. 중반에서는 진상을 밝힘으로써 전반부에서 깔아놓은 여러 고민들을 심화시킨다. 결말은 미해결 상태로 마무리 지어지며 여운을 남긴다. 완급이 잘 조절되어있고, 읽는 중간에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미의 면에서만 성공한 작품은 아니다. 작품 전반에서 형상화되어 있는 주제의식 역시 무척이나 흥미롭다.

 「소문의 벽」은 잡지에서 일하는 '나'를 중심으로, '나'가 우연찮게 기이한 인물인 '박준'과 조우하여 그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박준'은 맨 처음 정신병원에 들어갔을 때는 실제로 정신이상자가 아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척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거세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준'이 지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이처럼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열망은 모든 예술가들의 기본 정신이다. 만약 건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경험들에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예술이 굳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의 가뭄 같던 심장에 단비가 내려 그 굳은 땅이 촉촉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박준'과 같은 섬세한 영혼에게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일촉즉발의 상황이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 충격을 계속 마음에 되새기고, 골수까지 세뇌하여 자신의 입과 손에서 그 잔재들을 흘려왔다.

  그의 연약함은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좌냐 우냐를 골라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 그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떤 진술조차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혐의 받고, 유죄선고 받은 채 기다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박준'은 도망쳐 나올 수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용의자로 질식하고 있었고, 그 모든 의식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의 의사 역시 그의 진술을 딱지붙이고, 하나의 길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그가 도망치고자 했던 정신검열의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열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처에 있다. 예술가로서 그가 쏟아낸 진술의 노력은 같은 문학계 안에서도 검열 받는다. 개인적이고 사변적으로만 보인다면서 ‘박준’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안형' 역시 일종의 검열권력으로 작용한다. '안형'은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양호하다며, 그저 생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나 사익을 위해 편집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나'에게 주지시킨다. 하지만 사회적인 요구를 전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사회의 양심을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박준'의 소설을 자격이 없다고 단정 짓는 '안형' 역시 여전히 하나의 검열로 작용한다. 이러한 ‘안형’에 대한 '나'의 내면적 반발은 예술의 형식이라는 문제에서 작가 이청준이 예술의 자유로움을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발화된 말이 갖은 검열에 걸리는 것은 숙명적일지 모른다. 필자는 작가 이청준이 왜 이 단편의 이름을 「소문의 벽」이라고 지은 것인지 고민했다. 어떤 말이든 입으로 나가면 다 소문이 되어버리기에 작품을 통해서 한 말만이 진정한 대화가 된다는 '박준'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모든 말들은 검열을 통해 비뚤어지고 왜곡된다. 아무리 진의를 말하려 한다 해도, 진의와는 상관없는 다른 현실의 압력들에 의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 된다. 웅성거리는 그 말들은 참이지도 않고 오히려 소문으로만 나돌아 다니며 진짜를 가리고, 위선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이 왜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필자는 왜곡이 생기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는 원래 실제를 반영하지 않고 굴절한다. 하지만 이청준은 '나'의 입을 빌어 그 시대의 암울함을 강조한다. 그는 소설에서 '박준'이 받은 전짓불빛 비슷한 것이라도 안 받아본 사람은 없지만, 그 강도가 더함에 따라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더 커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강도 높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압력 속에서 꿋꿋이 자기진술을 펼칠 수 있을까? 그 시대 같이 고통스러운 시절에 손쉽게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이 감당해내야 할 고통의 몫이 없기 때문에 수준이 시원치 않으리라고 '나'의 입을 빌어 이청준은 그 시대를 진단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또한 단순히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간 상잔의 비극에서 발생한 상처도 안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때였다. 부지기수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우와 좌 중 하나를 눈 가리고 선택해야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한 검열의 철저한 희생자들이었다. 그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난 6,70년대의 현실에서조차 피해자들은 그 지독한 상처를 위로 받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감정적 이해보다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이름의 권위가 상처자리를 지져놓았다. 민족상잔의 시대는 가고, 새로이 부여받은 권위가 다른 사람을 제 멋대로 진찰했다.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확신은 '박준'과 같은 사람들을 실험실의 하얀 쥐 다루듯 하였고, 결국 실패가 된 실험은 그를 희생양 삼은 것과는 별개로 결국 나중에 어떤 식이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 의사의 무책임한 태도에 ‘나’가 깊은 환멸을 느낀 것도 의사의 태도가 그 당시 사회지도층들이 자신들의 권위주의에서 발생한 민간인의 피해나 민주주의의 후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충 눙친 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있어 가장 치열한 검열이자, 가장 무서운 고민은 그처럼 힘든 시대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진정한 의무가 무엇이냐는 문제다. 자신만이 꿈꾸는 세계를 유아적으로 몰입할 것인지,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밝히고 싸우기 위해 문학과 예술을 그 발판으로 삼을지의 문제는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청준은 '박준'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이분법을 경계하고, 인간이 발화로 삼는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결국 인간 사회의 현실이 녹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다른 이름의 검열이 되어 형편없는 시세 속에서 무의미하게 굴러가는 잡지에 대한 회의로 일을 그만 두는 '나'의 모습을 통해, 현실이란 낙인으로 예술을 검열하는 당대의 현실도 꼬집었다.

  이렇게 보면 「소문의 벽」은, 단순히 소통에 실패한 한 광적인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예술가의 관점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의 흥미유발도 잃지 않고, 주제의식도 놓치지 않은 이 훌륭한 중편이 탄생하기까지 작가 이청준이 자신이 몸담은 예술이라는 길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으로서의 접점을 얼마나 치열히 고민하고 형상화해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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