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Write a Thesis (Paperback)
Eco, Umberto / MIT Press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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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세상 유행에 관심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더욱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소식이 있고, 그 소식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으니,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어느새 마음에서 성급하게 시시비비를 가린다.

내가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기사에 내가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조건 낱낱이 겉핡기 식으로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해도, 정치현상 모두를 알아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일장일단이 있을 터인데, 아무튼, 내 공부만 하며 사는 나에게도, 이 김영민 교수 글이 화제라는 소식이 닿았다.

궁금해서 칼럼 글을 10개 정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왜인지 내가 요즘에 읽고 있는 Umberto Eco의 How to Write a Thesis의 내용이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연구자의 자세와 태도, 다른 말로 하면 소임에 관해서 상이할지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두 학자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학문하는 자의 소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김영민 교수의 글들 몇 가지는 정말 말 그대로 사람을 자지러지게 웃게 한다. "유학생 선언"에서의 사자탈 에피소드가 그렇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소위 지식인의 업무 중에 좋은 글솜씨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포함된다면, 이 사람의 글은 확실히 지식인의 그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들은 근엄과 엄숙함으로 지나치게 방패막을 두르니 그의 글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읽으며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전반적으로 모든 글들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저릿해진다. 

마냥 읽으며 웃기만 할 수 없게 사람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위 요새 말로 "빙썅" 있지 않은가. 

좋은 글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말일 수도 있는데, 빙그레 웃으며 욕하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이 교수가 말 그대로 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가 냉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끔 너무 웃겨서 그게 잘 안 보일 뿐이지.

그런데 읽다 보면 나는 그가 누구를 비판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며 나의 양심도 찔리는 걸 보니 말이다.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지 못하고, 제자의 논문조차 읽지 않고 논문 심사를 하는 스승들을 보며,


앞에 놓인 탁자를 당수로 쪼개며, “선생님들, 논문을 읽지도 않고 심사한다고 여기 앉아 계실 수 있는 겁니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에서, 벌거벗고, 흙을 주워 먹으며, 트랙을 뱅글뱅글 돌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 맞아, 그래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그런 순간들, 그래야 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이 꽤나 많았다. 

정말 위의 글처럼 유리창을 온몸으로 박살내면서 나가야 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부족했던 것이다.

내 몸이 너무 귀하고, 내 커리어가 참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글이 나온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도교수에게 불합리한 행정을 따진 대학원생은 얼마 후 대학원을 나가 고아원에서 일한다고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그 대학원생은 그 사건만 보면 정말 대단한 인재이자 인물이기 때문에 더 귀한 일을 하시려고 고아원에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여전히 "대학원"이란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가장 좋은 환경이니까. 우리가 전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완전히 양해되고 설명되지 않는가. 그리고 학자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결국 스승이 필요한 점이다. (언젠가 이 점에 관해 대해 글을 쓸 날이 오리라)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대학원이 충분히 그러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까?


나부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침없이 석사를 해외로 나가버린 사람이라 무엇을 어떻게 코멘트할 바 없다. 사실 미국에서도 교수가 박사생 노예취급하는 경우가 왕왕 생기니까 꼭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현재까지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석사를 국내에서 갔더라면 "학벌"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좋은 박사 유학이 더 쉬웠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내게 너무 많은 것이 뻔하게 보였다. 미국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여기서는 "안 그러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상황이 싫었다. 

한국에서 열등감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여러 불합리한 행정 속에 고달파하는 교수들의 짜증과 불합리한 카르텔들에 대해, 그들의 인격이 나빠서라고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저 구조와 체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최종점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권력과 교수라는 이름값의 권위 밖에 없으니,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이 있을까? 

물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많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어차피 영어 텍스트를 읽을 거라면 영어 하는 나라에 와서 읽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여러 부분에서 석사 유학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가장 좋은 건, 여기에 좋은 교수들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이게 정말 크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나의 멘토격은 인격이 완성되어 있다 (적어도 평판이 그렇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바로 내가 배울 만한 학자로서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언행일치. 연구준수. (물론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또 하나, 지금의 나는 영어책 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물론 말하고 듣기가 마음만큼 되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또, 홉스 리바이어던의 옛날 영어체를 읽으면서 욕이 저절로 나오긴 하지만, 이 세상에 많은 자료와 정보들에 한층 더 오리지널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학문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즐겁고도 즐거운 일이다. 

금전적 문제도 언젠가 상환할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과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아무튼, 김영민 교수도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보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접근이 상당히 감성적 (학문공부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비극적이고 로맨틱하다는 결론) 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게 학문공부는 결국 얻을 수 없는 최종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는, 모든 것들이기에 내게는 언제나 즐거운 과정이다. 



2.


학문공부의 즐거움을 나는 에코 책에서 느끼고 있다. 


Eco의 책은 기본적으로 제목부터 짐작하다시피 석박사생(박사생)이 어떻게 하면 졸업논문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요령을 매우 세세하게 전수하고 있는, 대가의 친절하고도 실용적인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논문 쓸 것을 주문한다. 이 논문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전반적인 "글"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든 무엇을 하든 사실 잘 쓴 글은 매우 고도로 전략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에세이들은 부끄러운 수준일 것이다. 거의 즉흥적으로 쓰고 웬만해서는 더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탈고를 하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수많은 자료, 자료, 자료이고, 그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이다. 에코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매우 세세하게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공부와 연구라는 것은 잘난 개인의 성취가 절대 아니라 그저 남들이 미리 쌓아올린 돌탑에 돌 하나 얻어내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또 웃긴 건 그 디딤돌 아무렇게나 올려놓으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값 인정 받으려면 기존에 쌓아져있던 돌탑과 어떠한 식으로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 돌탑 와르르 무너질 만큼 강력한 굴러들어온 돌이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은, 결국 타인들에게 값어치를 인정받지 않으면, 사회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아예 불가해하거나 자폐적이면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이다. 자폐와 독창은 한 끗 차이고, 그 돌이 쓸모 없냐 있냐도 한끗 차이다. 


그래서 Eco 글에 나오는 수도원장 Vallet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아름다운 예시다. 대충 이야기를 요약하면 열심히 연구하지만 적절하게 잘 맞는 실마리를 못 차던 Eco는 정말 어쩌다 우연히 한 책을 발견하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덮어버리겠지만 책값이 아까워서 읽은 저질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말 아름답게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이 즐거움 때문에 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모든 관계 없는 것들이 사실 관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합한 예시랄까?


에코의 울림은 참으로 크다. 우리는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배운다. 모든 곳에 가르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값어치와 배울 것이 있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른 모든 세상을 설명해주는 열쇠가 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열의가 없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해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전문적으로 하고 있을 뿐.


그러니 내 생각에 공부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발굴해내는 탐험가이고,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비평가이고,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을 이어내어 새로 재창조하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에 환원이 되는 날, 우리는 이 사회에서 밥값을 하는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3.


그래, 이렇게 보면 학자는 어쩌면 정말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내가 Eco 글 보며 느낀 것처럼 비록 개미처럼 사소하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듯 공부하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는 의미있을 것이라 본다. 사랑이야기는 비극이 재미진 법이고, 소시민의 삶은 안정적인 법이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을 글로 웃기게 하면서 양심 찌르지도 못하는 글 수준이라든지, 아니면 소박하게나마 사회에 밥값하려고 열심히 지식창조를 하지도 못하는 학자가 된다면 그건 그냥 폐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폐기물도 밥값은 한다. 반면교사가 된다는 점에서. 

아무튼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성취하려면 일상에서의 수련이 필요하다. 모든 지나가는 순간들을 돌아보고, 모든 지나갈 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진짜 그래야 그 두 가지 중 뭐라도 하지 않을까?

결국 공부 많이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딱 그 정도일 뿐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도 공부를 하면 행복할 것이다.

김영민 교수 말처럼 내일 아침 월요일이란 무엇인가! 고래고래 창문 열며 소리지를 수도 있고,

Eco처럼 파리에 어느 가판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무도 읽지 않을 책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은, 

공부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니까.



https://news.v.daum.net/v/2017072315040044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72049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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