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자나 교수가 쓴 소설은 재미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다.) 학식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은 미처 배우지 못했는지 현학적이거나, 꼬리를 무는 사유를 떨치지 못해 난삽하거나, 주제를 지나치게 강조해 막상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놓치기도 한다. 학자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당신은 문학 말고 학문만 하셔!” 라고 진심으로 충고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소설의 특징에서 방점은 ‘인생의 진실’뿐 아니라 ‘이야기’에도 찍힌다. 이야기만 난무하는 소설은 의미 없고 가볍다고 짜증내지만 끝까지 읽기는 한다. 반면 스토리텔링을 무시한 채 의미만 강조한다면 아예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집어 던진 책이 몇 권 된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모든 학자들이 재미없는 소설만 써댔다면 ‘학자’라는 꼬리표가 달린 작가에게 출판의 기회가 돌아갈 리 만무하다. 문화인류학자로서 [차가운 피부]가 첫 소설이라는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역시 예외에 속한다.

어려서부터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 (실제로는 무기를 든 게 아니라 공급했을 뿐이지만) 친구의 희생을 지켜봐야 했던 남자는 독립 이후에도 분열과 대립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조국을 떠나 무인도 행을 자청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형제가 영국군이 떠난 자리에서 서로 각을 세우며 각자의 이상을 찾으려 할 때, 남자는 어느 한 편에 서는 대신 모두를 버리고 버림받는다. 같은 목표를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던졌고 누군가는 그 목숨에 빚져 살아남았고, 마침내 목표를 이뤄냈는데, 그러고도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폭력만 일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환멸을 느낀 탓이다. 아무도 없는 땅에서 쉴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인간으로부터 입은 상처가 아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그를 맞은 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전임자(바티스)와 소통이 불가능한 괴물들이다. 밤마다 덤벼드는 괴물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바티스는 어떤 이해도 감정의 공유도 거부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서 헤어나려 하지 않는다. 괴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음에도 둘 사이를 이어줄 연대감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소통의 부재는 바티스의 개인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남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남자의 눈에 비치는 바티스의 모습만 알려줄 뿐이다. 대신 남자의 감정과 사고의 변화는 자세하게 언급된다. 자신을 돌봐주지 않은 바티스에게 분노하다가 함께 싸우면서 동료 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그와 닿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확인하기도 한다. 바티스가 길들인 괴물 암컷과의 수간을 통해 지극한 쾌락과 수치심이라는 양가감정에 동시에 빠져들며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흘러가고, 어느 날 괴물들을 지켜보며 그가 깨달은 것은 괴물들이 단지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래로 의사소통을 하고 다친 동료를 돕기 위해 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생명체가 어찌 단순한 괴물일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남자는 괴물들과의 소통을 희망한다.

올슨 스콧 카드는 SF 소설 [사자의 대변인]에서 외계인을 네 종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인간이고, 세 번째 ‘라멘’은 인간과 다른 종이지만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종족이며, 네 번째 ‘바렐스’는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로 모든 동물을 포함한다. 외계에서 처음 만나는 새로운 생명체가 ‘라멘’인지 ‘바렐스’인지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라멘’이라면 당장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할지라도 그들은 ‘사람’이며 언젠가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수천년 동안 숱한 외계 종족을 몰살시킨 이후에야 생겨난 것이다.

남자에게 괴물은 ‘바렐스’였으나 이제 ‘라멘’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책을 읽는 동안 작위적으로 보였다. 문화인류학자라는 피뇰의 이력을 생각할 때 제 3세계를 바라보는 서구인의 관점을 비판하려고 억지로 끼워 넣은 듯 했기 때문이다. 올슨 스콧 카드가 모든 종은 라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듯이, 켄 로치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통해 현재의 미국과 영국을 비판하듯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좀 다른 느낌이다.

남자는 괴물들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의 시도는 미미하고, 바티스는 그의 설명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 총을 쏠 수 없다고 버티는 것도 한 순간뿐이다. 낯선 존재에 대한 자신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꿨음에도 여전히 소통은 불가능하고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티스가 없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글쎄, 그는 바티스와 이해를 나누는 것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결국 괴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극한에 처해진 한 인간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과정인 듯 하다. 길들인 암컷을 데리고 있는 바티스도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남자 역시 바티스가 걸었던 길을 고스란히 따를 것인가? 이해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들과의 투쟁 속에서 살다 보면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함께 사는 방법을 모두 잊어버리게 될까. 아니면 전쟁과 같은 한계 상황에 이를 때 타인과의 공존을 배제하는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결말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사실 작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건 그대로 이 작품의 장점이 된다. 단순한 줄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사람마다 다양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소설가로서는 실패한 학자군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셈이다. 이러면 작가로서의 다음 행보가 기대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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