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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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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이 말을 전혀 다른 2가지 상황에서 내뱉는다.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친절하다 못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때다. 그리고 곧, 그 2가지 상황에 대해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간’에게서 끌어낸 이해를, 후자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것’에서 끌어낸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고, 또 동물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로서 폭력성과 잔혹성을 이해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본성이라는 의견이다. 동시에 우리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고, 또 신과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로서 도덕성과 친절함을 이해한다. 인간을 만들어낸 물질과 전혀 다른 무엇으로부터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의견이다. 프란스 드 발은 이러한 우리의 통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정말일까? 인간 그 자체에서 도덕성과 친절함은 찾아볼 수가 없을까?

프란스 드 발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낸 ‘물질’을 탐구한다. 즉, 인간은 어떤 물질(동물)인가? 라는 질문에 인간은 ‘포유류’이고, ‘영장류’라고 대답한 다음 포유류와 영장류에게서 ‘도덕성의 기원’을 밝혀내려고 한다.

 언제부터 인간이 포유류를 길렀는지는 몰라도, 이제 개와 고양이는 인간의 동반자의 위치에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애완동물에게 좋은 사료를 먹이고, 비싼 수술을 하고, 심지어 무덤까지 만든다. 왜냐하면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그들의 강아지 또는 고양이와 어떤 감정적 교감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파충류를 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개 또는 고양이와 같은 포유류를 기르는 까닭은 파충류가 주지 못한 어떤 것을 주기 때문이다.

 프란스 드발은 그것을 ‘공감’이라고 한다. 꿀벌은 군집생활을 하지만, 그들은 다른 개체에게 공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북이는 새끼가 태어나기 안전한 곳에 알을 낳으려고 애쓰지만, 그것을 새끼에 대한 감정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포유류에게는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아지와 고양이로부터 알 수 없는 위로를 느낀다. 몹시 화가 나거나, 너무도 큰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우리의 친구인 강아지와 고양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그들 또한 느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포유류의 특징이며,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자 바탕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을 보고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저것이 인간(동물)이야. 침팬지와 인간의 행동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너무도 유사한 그들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영장류에 대한 확고한 판단이 생겨난다. 오래전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이 영장류와 가까운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침팬지와 전혀 다른 영장류를 소개한다. 바로, 보노보다.

 보노보라는 영장류는 침팬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보노보가 너무도 착하고, 고귀하며,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보노보는 인간이 지닌 도덕성과 친절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들에게 인간과 같은 도덕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도덕성이 완성되기 ‘직전의 모습’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게 한다. 인간과 달리 보노보는 학교에서 윤리를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종교 또한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보노보가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들은 우리가 가진 도덕성이라는 ‘감정’과 공명한다. 우리가 새끼에게 관대하듯이 그들은 새끼에게 관대했고, 우리가 과도한 분쟁 및 다툼을 피하려 하듯이 그들 또한 분쟁을 피하려 했다. 우리가 스스로 낳지 않은 아이를 길러내듯, 그들 또한 자신이 낳지 않은 새끼들을 길러냈다. 이제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유인원이 그럴 수 있을까.

 물론, 보노보는 도덕성의 화신으로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다. 인간 또한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보노보를 보다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도덕성은 저 진흙 속에서 우리의 몸과 함께 진화해 온 게 아니었을까? 프란스 드 발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고, 때로 친절하며, 때때로 인간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향한 잔혹한 행동을 하는 까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인을 향해 친절한 행동을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있는 셈이다. 물론, 폭력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폭력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도덕성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모든 인간이 엄청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서 놀랄만한 도덕성 또는 타인을 향한 애정으로 칭송 받는 이들은 ‘단지 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이 폭력성을 진화해 온 만큼 동시에 사회성과 도덕성을 진화시켜왔다는 생각은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에 한 줌의 희망을 던져준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하면서도 친절할 수가 있는가. 그 둘의 질문은 바로 이 땅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대답이 될 수 있다. 결국,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이 어떤 종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들의 손에 달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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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맛
김사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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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김사과는 여행 에세이를 냈고, 그의 글에는 여행의 표정이 없었다. 여행의 표정은 무엇인가. 흔히 여행기에서 쉽게 느껴지는 것, 여행을 권장하는 이들이 줄곧 지어보이는 것, 그러니까, 페이스북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표정 같은 것. 이를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해맑음.’ 이곳의 여행기는 죄다 그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건 마치 페이스북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결국 여행기는 세련된 신파극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김사과의 『설탕의 맛』에는 그게 없다. 으레 여행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표정이 없다. 


 감동과 감탄. 여행의 필수적 감정들. 사람들은 언제나 ‘그곳’은 ‘여기’와 다를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껏 감동했고, 한없이 감탄했다. 그것은 마치, 공간을 통해 시간을 건너뛰는 것 같았다. 지나간 과거를 만나고 감동하거나, 다가올 미래를 꿈꾸며 감탄하거나. 언제나 가장 구질구질 한 것은 바로 ‘현재’였으므로, 자고로 여행이란 과거나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여행을 가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설탕의 맛』은 뉴욕과 포르투와 베를린과 다시 뉴욕을 거쳐 가면서 자꾸만 하나의 도시만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서울이었다.


 익숙함. 익숙했던 것. 곧, 익숙해질 것. 그것은 놀라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름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신상품 같은 다름이었다. 신상품은 예전 상품과 다르다. 하지만, 익숙하다. 아이폰5S는 아이폰4와 다르다. 하지만, 익숙하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상품들은 지방의 상품과 다르다. 하지만 곧 그것은 익숙해질 것이다. 여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해지고야 말 신상품의 최신 유행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것 정도에 불과해졌는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길한 느낌. 김사과의 여행기에는 그런 예감이 짙게 배여 있다. 


 그러니까 보고 있는 것은 뉴욕이라는 서울이고, 포르투라는 서울이며, 베를린이라는 서울이다. 그것은 서울의 신상 버전 혹은 구 버전이거나, 아니면 그저 제품넘버만 다른 같은 회사의 상품 같은 것이다. 『설탕의 맛』에서는 각기 다른 지역의 풍경들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기존의 여행기가 내뱉었던 ‘다른 세계’ 따위의 판타지가 아니라, ‘다른 제품’의 설명서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여기는 이렇군. 어, 저기는 그렇군.


 ‘다른 세계’는 사라지고, ‘다른 제품’만 남은 사회, 그것은 불길하지만 달콤하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른 제품’이 주는 달콤함에 적응한지 오래다. 오래전 ‘다른 세계’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제품’에 열광한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제품’일거라고 믿는다. 설령, 그것이 가짜 세계일지라도, 가짜 신일지라도, 가짜 구원일지라도, 어떠한가. 어차피, 진짜는 사라졌는데. 하여, 이 여행기에 다른 세계는 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각기 제품 넘버가 다른 유사 제품에 대한 후기 같은 것에 가깝다.


 여행의 표정이 아닌 제품의 표정. 『설탕의 맛』이 짓는 표정. 그것은 건조하지만, 달콤하다. “샴푸 냄새 나는 죽음” 같은 것. 그것은 정말이지 “나쁘지 않아”보이기에, 기꺼이 빠져 익사당해도 좋을 것만 같다. 아니, 이미 이곳에서는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서울의 풍경이자, 뉴욕의 풍경이며, 포르투와 베를린의 풍경이었다.  



 뉴욕과 포르투와 베를린에 대한 김사과의 글을 보면서, 나는 그가 서울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서울이란 제품에 대한 후기 같은 것.) 아니 어쩌면 서울에 대한 에세이가 바로 이 『설탕의 맛』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분명히, ‘서울 SEOUL 14’ 라는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어도 그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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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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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한 번 듣는 이야기와 계속 듣는 이야기. 내게 김사과의 소설은 두 번째에 속한다. 첫 번째, 그러니까 한 번 듣는 이야기의 특징은 이렇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읽는 이야기, 즉 어떻게 될지 아는 순간재미없어지는 이야기. 그러나 김사과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듣는 순간이 즐거워서 듣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내게 김사과의 소설은 서사적 호기심을 채우는 무엇아니라, ‘강렬한 감정적 체험인 셈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인가? 분노. 물론 이 정제된 단어에 강렬한 감정을 우겨넣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단어가 아니라 단어에 담긴 맥락을 떠올려보자. 당신에게 강렬한 체험을 남긴 분노와 그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해보라. 바로, 그 느낌. 김사과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체험된다’.


누군가 화가 났다. 그러면 누구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는 왜 화가 났지? 마찬가지로, 김사과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 많은 분노는 어디서 왔는가? 그동안의 소설에서도 언뜻언뜻 분노의 기원에 대해서 서술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지만 천국에서는 아예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스물 나와서 마침내 독자를 삼켜버리는 에너지, 그 강렬한 감정의 기원에 대해서. 그곳은 어딘가. 소설을 삼켜버리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어딘가. 어디긴 어딘가. 바로, 천국에서. 그렇다. 소설의 세계를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하고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기원이 불분명한 그 감정들은 천국에서나왔다.


그렇다. 이곳엔 천국이 있었고, 천국이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은 작동했다. 내일은 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내일도 천국에서 살아갈 거라는 믿음과, 어제는 천국에서 살아 왔노라는 믿음으로 세상은 유지됐다. 바로, “20세기에 대량생산된 중산층의 세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천국은 두 조각으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않는 저 안드로메다의 차원으로 날아간 천국과 지상의 밑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천국으로 중산층의 세계는 갈라졌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추락하는 천국에 속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믿음으로 세계를 유지했던 천국이라는 허상은 틈이 벌어졌고, 그 틈새에서 이름 없고, 불길하며, 역겨운 감정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천국에서 나온 것들이었지만, 천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했다. 부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 중 하나는 그 모든 것들을 본 적이 없는 양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 먼 사람들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해맑은 사람들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인지부조화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니까, 끝없이 미루기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루기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여, 다른 식으로 부인하는 방법이 나왔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더는 알 필요가 없다는 신종 부인법.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천국이 쪼개지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떨어지는 천국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틈새에서 터져 나오는 역겨운 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모르는 놈들과는 다르게 알고 있다. 나는 눈 뜬 자이며, 나는 순진하지 않다. 물론, ‘알고 있다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모든 혼란에서 벗어날 탈출구. 문은 빠르게 닫히고 있었다. 아니 문으로 뛰어갈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문은 닫혀 있는지도 몰랐다. 천국에서의 주인공 케이는 망설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문은 너무 멀리 있었고, 너무 많이 닫혀버렸다. 그러나 케이는 상상할 수가 없다. 케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 케이는 체험한 적이 없었다. 문이 닫히고 난 세계에 대해서 케이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케이는 그것을 자살과도 같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내일도 천국에서 살아갈 거라고 믿는 세계 말고, 내일은 저 천국으로 들어갈 거라고 믿는 세계 말고, 세상에 천국은 없다고 믿는 세계 말이다. 그러니까, 바닥의 세계. 밑바닥의 세상. 추락하는 자신의 세계조차 배부르다고 부르는 곳. 그곳에서 케이는 언제나 같은 소리를 듣는다. ‘넌 우리와 달라.’ 결국, 케이는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세계가 달랐던남자친구 지원에게 이별을 통보 받고, 세상 경험 풍부하며 지혜로워 보였던 386 아저씨에게 조언을 구한다. 한 때 영롱했던, 그러나 언젠가부터 망가져버린 386 아저씨의 대답은 이랬다. ‘넌 그들과 달라.’ 케이가 살았던 세계는 천국 같은 수족관이었으며, 케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수족관에서 얌전히 갇혀서, 정해진 위험과 주어진 도전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386 아저씨는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케이는 망가져버린 386 아저씨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다.


정해진 위험과 주어진 도전이라는 짜여진 각본 속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며, 카페에서 열심히 삶에 대한 도전, 그러니까 시험 준비를 하던 중 케이는 갑자기 머릿속에 어떤 의문이, 어떤 불만이, 어떤 감정이 솟구친다. 아마도, 그것은 이런 질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달라?’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짐짓 삶의 경험이 농축된 조언인 듯 보이는 그 태도. 사실 그것은 또 다른 부인법이 아니었을까? 저기 넘실되는 불쾌하고 역겨우며 이름 없는 에너지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만으로는 견딜 수 없어진 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부인법.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계약기간을 이틀 앞두고 잘려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끝없이 무급인턴의 뺑뺑이를 돌고 있는 이들과 나는 달라, 상가를 잃고 옥상에 올라가서 생존권을 외치는 이들과 나는 달라,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 무책임하게 회사에서 잘려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하루 12시간씩 일하고도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들과 나는 달라. 여기는 천국이니까. 여기는 진짜 바다가 아니니까. 여기는 수족관이니까. 여기는, 여기는, 여기는…….


마침내, 케이는 참지 못하고 카페를 뛰쳐나간다. 그 순간, 케이를 가로막는 수족관 벽은 없었다. 어쩌면 케이는 알게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바다에 있음을. 자기도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나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케이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갔던 것이다.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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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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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변방을 찾아서’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글쓴이가 딛고 있는 곳은 ‘변방’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써, 변방을 ‘찾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신영복 교수를 ‘변방의 인물’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감이 있다. 단적으로, 그의 퇴임식이 열렸던 2006년, 그 자리에는 당시의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또한 조정래 소설가와 고(古) 김근태 의원도 함께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나 같은 사람) 얼굴조차 보기 힘들 사람들이 그의 퇴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 인문공부’라는 이름의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과 이인영 국회의원, 신헌철 SK 에너지 부회장, 김연배 한화 부회장이 참석했다. (사실, 그들과 나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기업인의 경우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확실히, 지금의 신영복 교수를 보고 변방의 인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애써 변방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지금도 ‘중심’에 있는 인물이 변방에 다가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시대의 주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한 후광을 지닌 채로, ‘그렇게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가면서 ‘중심에 도달하는 비법’을 전달하는 이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니까, 바로 ‘중심의 전도사들’ 말이다. 신영복 교수의 삶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서사를 지녔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감자에서 재벌 총재가 퇴임을 축하해주는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그 어떤 성공기보다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중심의 전도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영복 교수는 이제 더는 변방에 있다고 말하기가 어색하게 되었지만, 그의 서체는 여전히 변방에 있었다. ‘학군의 정점’ 서울과는 한참 동떨어진 지역의 ‘초등학교 분교’에 있었고, 사람이 붐비는 율곡 이이와 심사임당의 강릉 오죽헌과는 달리 한적한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에 있었고, 당시엔 패배자에 불과했던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 장군 추모비’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들을 찾아가는 일종의 여행기가 바로, 『변방을 찾아서』인 셈이다. 아직, 우리는 그가 왜 그런 변방을 찾아 나섰는지 답을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의 문장에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성(城)을 벗어나는 해방감이 생명이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여행은 자기 생각을 재확인하는 것이 된다.” 12p



이것을 그의 여행론으로 본다면, 그는 ‘중심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 변방을 찾아 나선 이유가 된다. 어느 지방의 초등학교 분교에 21세기 서울식 교육문화(얼마 전, 서울의 국제영어학부를 운영하는 모 유치원은 사립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자랑스레 내걸었다.)를 전파하려 했던 게 아니었고, 역사의 패배자가 된 장군 앞에서 자신은 끝끝내 승리자가 되었노라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뜻이다. 오히려, 무언가를 ‘배우려’고 찾아간 거라 할 수 있다. 도대체 변방에서 배우면, 얼마나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건가? 그런데, 그가 찾아간 변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변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뭔가?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亞流)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141p



 즉, 그가 찾아 나섰던 변방은 ‘중심의 아류’가 아니었고, 중심과는 또 다른 ‘창조 공간’이었다. 사립유치원-사립초-특목중·고 이어지는 서울의 교육과 다른 것을 창조하고 있었던 곳이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였고, 조선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으로 자신을 마냥 구겨 넣지 않으면서 놀라운 시를 창조한 이가 허난설헌이었고(그 시대에 여성은 시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결코 주연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그리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창조한 것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었다. 이곳들은 중심이 되지 못해 우울한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이 알지 못하는 재미를 창조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책을 덮은 후, 내가 있는 곳을 잠시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로 넘쳐난다.(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네 삶은 짝퉁이 되거나 꽝이 되어버린다. 중심이라는 ‘명품 원본’에 최대한 닮아가려고 애쓰면서, 끝끝내 ‘일치’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짝퉁’이라 매도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꽝’이라고 적힌 복권처럼 여겨버리기 일쑤다. 동시에 어떤 망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열심히 모방할수록 자신의 삶이 명품에 가까워진다는 믿음과,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디에선가 ‘꽝’이 아닌 다른 삶이 존재하리라는 믿음 말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삶은 위계적으로 전시된 상품이 아니다. 특정 브랜드의 삶을 열심히 모방해서 삶의 위계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한 것은, 사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역시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 이곳 말고 어디에선가 ‘당첨’된 너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제비뽑기에는 ‘꽝’이란 없다는 뜻이다. 당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당신의 삶’이다.


 어쩌면 변방을 찾아야 하는 이는 ‘변두리’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자신의 삶을 짝퉁으로 매도당하고, ‘꽝’이 적힌 복권처럼 내다버리도록 타인과 자신에게 강요당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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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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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운명의 슬픈 사랑 이야기. 흔히, 오페라의 유령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불쑥,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운명을 믿습니까? 아니, 믿어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 사람, 운명이었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알 수는 없지만, 오페라의 유령이 어떻게 대답했을지는 압니다. 오페라의 유령, 에릭은 운명을 믿었습니다. 바로, 크리스틴 디에가 그 주인공입니다.


 운명이 있다면, 그것을 예감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소설은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미 에릭은 크리스틴 디에의 음악 천사로 강림한 후에 이야기가 시작되니까요. 그러나 운명을 ‘확신’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그녀는 달라!’ 라고 자신하는 순간 말입니다.


 마침내, 에릭이 크리스틴 디에를 자신의 지하 공간에 데려올 때의 일입니다. 페르시아인 다로가는 그것을 에릭의 욕망이 일으킨 납치로 보고 그녀를 풀어주라고 합니다. 그때, 에릭은 말하지요. ‘그녀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 증거로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줘도, 자신을 사랑해서 되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크리스틴은 되돌아옵니다. 그뿐인가요. 에릭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 놀라기는 하지만, 에릭의 어머니처럼 외면하지 않고 바라봐 줍니다. 이때 에릭은 그녀가 운명이 아닐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운명을 확신하는 과정도 에릭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취약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릭처럼 외모이기도 하고, 가정사이거나, 가난 또는 신체적 질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게 ‘드러나면’, 더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취약성을 불편해하거나,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운명이 아니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그녀는 정말 달라!’


 마냥, 일이 잘 풀렸다면, 사람들은 운명 앞에다가 ‘비극’이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릭이 크리스틴을 지하공간에 데려온 후 다시 밖으로 보내주었을 때, 그녀는 라울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끔찍한 불행이 닥칠 거예요. 하지만 돌아가기 싫어요! 돌아갈 수 없어요! 땅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너무 무서워요! 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코앞으로 닥쳐왔군요. 하루밖에 남지 않았어요.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이 찾아와서 목소리로 저를 유혹해 갈 거예요. 그리고 땅 속으로 끌고 가겠지요. 해골 같은 얼굴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리겠죠! 아, 그 눈물이란! 라울, 깊게 팬 해골의 검은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생각해보세요. 다시는 그런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여기서, 너무도 간단히 그녀를 “나쁜 년”이라고 부르거나, “그녀도 결국 똑같네”라며 단정 지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흔히 지나온 인연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 남자도 결국 어리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던 걸” “그 여자도 역시 돈 많은 남자를 좋아했던 거야”
 “불쌍한 에릭!” 크리스틴 디에는 에릭의 정체를 알고 나서, 이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랑에 눈 먼 도련님, 라울은 그마저도 질투하지만, 돌이켜보면 크리스틴은 ‘사랑스러운 에릭!’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죠. 나쁜 년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녀는 착합니다. “땅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걸 아는 여성이지요.


 결국, 운명은 ‘비극’이 되고, 사랑은 ‘슬프게’ 변합니다. 오페라 하우스 밑에 숨겨놓은 화약으로 위협해서라도, 크리스틴과 함께하고 싶었던 에릭이지만, 끝끝내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라울’과 함께 그를 떠납니다. 그렇게 운명을 떠나보낸 후, 에릭이 어떻게 살았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다로가를 찾아와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자신의 유품을 맡겼다고만 나오죠. 그러나 우리는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운명이라 짐작했던 이가 떠나갔을 때 우리 꼴이 어때했는가를 돌이켜보면서 말이죠. 자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았고, 얼굴을 바라봐 주었으며, 입맞춤까지 건넨 크리스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운 여성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운명을 만나지 못하리라’고 좌절했겠죠.


 연애와 사랑에 관한 탁월한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딱 맞는 운명의 그녀가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오빠에게 동생이 말합니다.


“오빠가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알겠는데, 난 아니라고 봐.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다음번에 다시 생각해보면 오빠도 알게 될 거야. (Look, I Know you think that she was the one, but I don't. Now, I think you're just remembering the good stuff. Next time you look back, I really think you should look again.)”


 저는 에릭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에릭처럼 운명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운명이 떠나 가버렸다고, 다시는 그런 운명적인 만남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운명을 비극으로 끝내기에는, 사랑을 슬픔으로 맺기에는, 아직 우리의 삶은 저만큼이나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갑자기 찾아온 운명은, 어느 날 떠나가 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던가요? 세상이 끝나던가요? 아닙니다. 단지, 또 다른 운명이 찾아올 뿐입니다. 지나온 운명을 헤집고 있어서, 눈앞의 운명을 놓치지 않는 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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