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자크나 스탕달의 시대에 다른 작가들이 과연 없었겠느냐고. 그 시대에도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고. 다만 시간이 흘러 후세의 사람들에겐 발자크나 스탕달만 남아 있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오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저 또한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사라지는 소설가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비하도 아니고 현재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글을 쓰는 한 저는 제게 주어진 모든 조건의 최전선에서 싸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죠" 

 표절로 시작하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이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병상에 누워 죽음의 막바지에 다다른 선생님은 삼십 년이 지난 반성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소설가는 오래된 숙제를 하듯 반성문을 써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작업이었지만 그 작업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변명으로 바뀌어진다.  더 우스운 사건은 마지막에야 드러난다. 소설가가 어린 시절 표절해 장원의 영광을 안았던 그 이야기의 작자마저 사실은 누군가의 글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축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성문을 요구하는 선생님은 예술가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똑똑한 작가는 남의 글을 훔치고 천재적인 작가는 훔쳐 온 남의 글을 '자기화'시킨다는 비슷한 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창작물은 '최초'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모방과 모방이 뒤엉키며 조금 더 나은 새로움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표절에 표절을 거듭하는 행태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이야기의 묘한 매력 때문에 이야기를 가져오게 되고 그 이야기에 이야기를 덧대어 아름다운 사건을 탄생시킨다. 그러다보니 그 이야기는 이제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문학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은 그런 체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남의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스스로 '정류장'의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가 사라진 뒤에 남겨진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그 소녀와의 만남은 미술실로 이어지며 스스로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자신이 표절했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괴로워하며 절방에 들어가 선생님이 요구한 반성문을 작성하려고까지 한다. 성장의 켠켠마다 그는 그 진실의 무게를 짐으로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죽음에 임박한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써오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는 과거의 사건들을 꺼내오며 반성문을 집필한다. 그것은 반성문을 가장한 소설이었고 한 생명을 위해 연재하는 단 하나의 소설이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반성문, 가치 있는 소설이 있을까? 

이것은 예술가가 느끼는 이편과 저편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이면서 스스로를 옹호하는 변명문이고 그 변명으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질지도 모를 것 같아 내리는 채찍이다. 그 기본 자세에 대한 묻는 소설이다. 

누구나 이런 표절의 유혹은 있다. 하지만 모방이라는 것에서 또한 창조는 나온다.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의 글을 쉽게 팔아먹는 '작가'는 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발자크나 스탕달이 될 수는 없지만 발자크나 스탕달 만큼의 자존심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작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