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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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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헤세의 에세이를 읽었다. 정원을 가꾸며 쓴 글과 그림이 함께 실려 있는 책이었다. 헤르만 헤세라니, 참 오랜만이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 싯다르타를 처음 읽었던 게 중고등학생 때였으니까 스물한두살 이후로는 헤세의 글을 거의 읽지 않은 셈이다. 데미안과 한스와 고빈다 대신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는 헤세의 초상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 표지를 넘기며 여유롭고 평화로운 노인의 세상 다 산 이야기 같은 거라면 별로 읽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했더랬다. 다행히 몇 장 넘기지 않아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확인했지만.


이 책을 선택한 것은, 그 경험 때문이었다. 헤세의 에세이를 또 읽고 싶었다. 처음 몇 장은 잘 읽히지 않았는데-번역 때문인가? 라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더랬다-헤세가 보덴 호수 근처에서 살아가던 시기의 에세이를 모은 2부부터는 넋을 잃고 읽었다. 떠들썩한 놀음거리도, 화려한 구경거리도, 명예로운 자랑거리도 나오지 않는데 글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놓곤 하는데 2부엔 도저히 붙일 수가 없었다. 모든 장에 다 붙일 수는 없었으니까. 마음이 뭉글뭉글해지는 구절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한때 소년으로서, 대담하고 뻔뻔한 소년으로서 삶에 관해 우리의 당연한 권리로 기대했던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 중 실제로 실현된 것은 얼마나 형편없이 적었던가. 그렇지만 삶은 살만하고 아름답다. 삶은 신성한 힘으로 매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중략) 그들은 나중에 장미 대신 하찮은 잡초가 자라는 한 뙈기의 거친 땅을 발견한다. 그들은 잡초를 꽃다발로 묶어 창가에 세운다. 저녁에 어둠이 색깔을 없애고 노래 부르는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면 그들은 다발을 애무하며 미소 짓는다. 마치 장미라도 되는 것처럼, 또 바깥의 밭이 동화의 정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78쪽)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헤세의 글은 젊다. 자유롭고 청명하다. 종이끼리 부딪치면 쨍 하는 종소리가 맑게 울릴 것만 같다. 글 속 헤세의 영혼에는 소년이 있다. 두렵지만 겁내지 않는, 위협에도 미소로 답하는, 슬프지만 웃는, 유머러스함이 있다.


밖에서는 소나기가 맹렬히 쏟아졌고, 마을 골목은 누런 개울이 된다. 지붕은 쏟아지는 호우로 인해 하얀 빛으로 반짝인다. 호수 너머 저쪽에는 번개가 치고 우르릉 쾅 하고 천둥 소리 울린다. 나는 이런 미쳐 날뛰는 광경에 소년 시절처럼 불손한 쾌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긴 장화와 로덴 천으로 만든 비옷을 입는다.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쓰고는 크게 노한 시끄러운 뇌우 속으로 걸어 나간다. (100쪽)


그 유머러스함이 감동적인 건,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무책임한 낙관을 얘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두움과 밝음을 모두 바라본다.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차분히 자신을 흐르는 물 위에 내려놓는다. 물질이나 명예를 탐하는 마음, 가식이나 허세를 부리는 마음이 물 밑 저 바닥으로 가라앉은 후 남은 그의 영혼이 물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 뭐가 맘에 들고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따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현재를 향유한다. 컴퓨터로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타닥타닥 쳐내려간 글 같지 않고, 붓으로 유려하게 그려내려간 수채화 같다.


회고는 멀리 떨어진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향유할 뿐만 아니라 매일을 행복의 상징이자 동경의 목표이며 천국으로 드높이면서, 자꾸만 새로 향유할 것을 가르친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만큼의 생활감정, 온기와 광채를 짜낼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이제 모든 새날의 선물도 되도록 순수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통도 더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는 큰 아픔 역시 큰 소리로 진지하게 맛보려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두운 날들의 기억도 아름답고 신성한 소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87-88쪽)


그래서 내게 이 책이 여행기라는 건, 사실 별 의미 없었다.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고 무슨 사진을 찍고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구경했는지 궁금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탈리아에서건, 말레이시아에서건, 열대 우림 속에서건, 테신에서건, 스위스에서건, 슈바벤에서건, 헤세는 헤세니까. 어떤 장소에 존재하든 방랑 중의 일시적인 머무름이었으니까. 떠나온 곳이 결국 돌아갈 곳이라면 무엇에게도 사로잡히지 않고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삶이 죽어감과 동일한 의미라 할지라도, 어쨌든 지금 나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 나 자신이니까.


방랑에 대한 동경은 고향과 어머니의 추억, 삶의 새로운 비유에 대한 동경이다. 방랑에 대한 동경은 집을 향한다. 모든 길은 집으로 나 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탄생이고, 발걸음 하나하나가 죽음이다. 모든 무덤은 어머니다. (309쪽)


이 책이 여행기여서 좋았던 건, 동양을 바라보는 헤세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 줬다는 점이다. 아시아를 약탈의 대상이나 신비한 존재로 바라보았던 20세기 초반의 영미인들 및 유럽인들의 시각을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지만-사실 이건 그 시대를 살았던 유럽의 지식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아시아인들을 찬미하는 듯한 문장이 이어질 땐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나 역시 21세기를 사는 아시아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ㅠ) 유럽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차별과 약탈을 인식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를 냉철하게 서술해 나가는 부분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원시 민족 역시 즉각 나의 사랑을 얻었지만, 그것은 더 어리고 약한 남매에 대한 어른의 사랑이었따. 동시에 이런 민족을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형제나 동정하는 친구, 도와주는 안내자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다만 그들에게 도둑, 정복자이자 착취자가 되었떤 유럽인의 죄책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주약) 유럽의 영혼이 그들에 대해 부채의식과 속죄하지 않은 죄의식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도 지역의 억압받은 민족들은 가령 유럽의 노동자 계급처럼 좀 더 오래되고 같은 근거가 있는 권리를 지닌 채권자로서 우리의 문명에 맞서고 있다. (259쪽)


물론 여전히 아쉬움이 남긴 한다. 글보다는 편집과 번역 때문이다. 주욱 숨을 죽이며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어 이거;' 하게 되는 문장들이 체한 듯 가슴에 걸렸다. 중간중간에 헤세의 사진이 실려 있어 좋기도 했지만, 좀더 컸다면 그리고 컬러였다면 더 좋았겠다는 욕심도 들었다. 헤세가 여행했던 지역들이 지도로 실려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나 이런 아쉬움들을 다 덮을 수 있을 만큼 헤세의 글이 아름답고 글 속에 묻어나는 그의 생각들이 감명 깊기에, 이 책 읽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헤세처럼 늙어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려다가, 아니라고, 그처럼 나이를 먹어도 먹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되뇌어 본다. 무엇을 만나도 웃으려 했던 그처럼 나 역시 웃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잘 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며칠 정도나 귀향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추측건대 아직도 오랫동안 여행할 것이다. 아마 겨울 내내, 어쩌면 평생 동안. 결국은 곳곳에서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때로는 나의 천사가 어느 어스름한 시간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또 내 청춘의 성소들이. 그리고 어디서나 내 자유의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거나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단지 슬퍼하지만 않고 웃으리라. 내가 가끔 그렇게 생각했듯이, 아마 내 안에 어떤 해학가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러면 나는 잘 해나갈 것이다.  (470-471쪽)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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