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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고 주님, 제 손을 놓지 마소서. (135쪽)


9월 25일, 저는 헤세의 책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그가 정원에서 보낸 노년을 상상했습니다. 아버지의 침대 곁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리뷰를 썼습니다. 문득 뉴스에서 익숙한 이름과 함께 '…암으로 투병하다가…'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바라보니, 당신의 이름이 자막으로 떠 있었습니다. 당신의 영정 사진을 배경으로. 아, 아직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못했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병으로 고통받던 때에도 카톨릭 주보에 투병기를 썼다고 했습니다. 죽기 전까지도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한 자 한 자 손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책더미 속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원고들도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그 글을 모아 유고집을 펴낼 거라고 했습니다. 늙고 까칠하고 깡마른 손으로, 여기저기 주삿바늘 자국이 남은 손으로, 당신이 힘들게 글자를 적어내려가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나는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뉴스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잠든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당신의 손만큼, 늙고 까칠하고 깡마른, 여기저기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던, 그 손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소서.  (94쪽)


요즘 챙겨 보는 웹툰 중에서 병원에서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 있습니다. 아내는 입원해 수술을 받고 이어 치료를 받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간병합니다. 6인실에서 아픔에 괴로워하는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만납니다. 그 만화 중간에 나오는 아내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저쪽 세계도 아니고 그쪽 세계도 아닌 곳에서 살고 있구나. 내가 모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입원하기 전에는 아내도, 남편도, 자신들이 있는 곳과 같은 장소의 존재를 상상도 못했었겠죠.


입원하신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병원에 머무를 때마다 여기는 병원 바깥 세계와 분리된, 또다른 세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침 7시와 오후 12시와 저녁 6시면 꼬박꼬박 세 끼를 침대 앞으로 가져다 주고, 하루에 대여섯번씩 혈압과 체온과 산소 포화도를 체크하고, 8시간마다 간호사가 교대되고, 이틀에 한 번씩 링겔 주삿바늘이 꽂히는 팔을 바꾸는 세계. 기침 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와 신음 소리와 간병인-병원에서는 '여사님'이라고 부르죠-들의 목소리가 끊임 없이 이어지는 세계.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침대 위를 뒹굴고, 이불과 같이 온 몸을 말고, 이를 갈고, 꽉 다문 이 사이로 신음을 내뱉고,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지르고, 울고, 화를 내고…그러다 갑자기 숨을 멈춰버리기도 하는 세계. 거기서 나는, 생과 사의 경계가 멀지 않다는 걸 목격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난척 해봤자 육체적 고통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산 몸뚱이에 뾰족한 바늘 하나가 들어오면 세상이 끝난 듯 소리를 지르는 게 인간이니까요.



바라옵나니, 우리 목숨의 하루하루를 천성의 경건함으로 채워 주소서. (70쪽)


그런데 당신은, 거기서 글을 쓰셨더군요. 멀쩡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입밖으로 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을텐데.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어서 몸에 힘을 주는 게 힘들었을텐데. 소리내어 기도를 하고, 요한복음을 칭찬하고, 농담을 하고, 아픈 이를 위로하고, 만나는 이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더군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일 때도 계속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하셨더군요. 무엇이 그리도 감사했을까 생각하다가, 당신의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주님꼐서 주시는 고통을 통해 내 자신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숨 한 번도 쉬지 못하는 무생물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도 함께 주소서. 제 보잘것없는 고통이 작으나마 주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는 도움이 되게 하시고 절대로 악마에게서 지켜 주소서.


마음 속으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하소서. 겟세마니 동산의 피땀을 생각게 하소서. 잠이 들었던 제자들과 달리 한 시간이라도 깨어있게 하소서.


육체는 악마이며 이 육체는 주님으로 가는 시선조차 방해하려고 합니다. 아아, 주님 도와주소서.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저는 불타는 연옥의 가장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주님, 제 허리띠를 묶고 저를 끌고 가소서. 저는 눈먼 자이니 제 뜻과 의지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나이다. 성모님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불쌍한 죄인을 돌보소서. 품에 안아 주소서.                             (255-259쪽)


그 고통 속에서 당신은 당신을 지키시는 손을 보았겠지요. 당신을 지키시는 손이 당신과 함께 하심을 보았겠지요. 덕분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겠지요. 깨어있을 수 있었겠지요. 한없이 약해지는 순간에, 나 자신이 얼마나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지 알게 되는 순간에, 처절하게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순간에, 그렇게 약하고 사소하고 보잘 것 없고 가라앉은 존재라는 이유로 더욱더 강하게 돌보시고 안아 주시고 지켜 주심을 믿었던 당신을 보며,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감사했던 당신처럼 감사했습니다. 경건함으로 당신의 하루하루가 가득 찼듯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아버지의 하루하루도 경건함으로 가득 차길 기도했습니다.



부디, 이제 두려움 없이 훨훨 날으시길 -김연수 (333쪽)


누군가는 당신의 이 책을 보며 1987년 8월에 당신이 적은 문장을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예수쟁이', '아아, 마침내 지고 말았군' '아아, 그가 마침내 인간으로서 약해졌구나' 라고요. 암이라는 병 앞에서 신앙 이외의 길을 찾지 못했다고요. 결국 이렇게 신을 찾는 약한 인간으로 죽었다고요. 이건 그냥 종교서잖아, 라고 불편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맹목적인 구복과 다르다고 믿는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감사하고 감동했습니다. 당신의 기도야말로 한계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하는 방법이었다고 믿으니까요. 자신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이라고 오만해하는 대신 절대적 존재 앞에 한없이 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였으리라고 믿으니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겸손했기에 고통 앞에서 불평을 구토처럼 쏟아내는 대신 절절한 기도로 자신을 지켜내고 모두에게 감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으니까요.


당신의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도 지금 기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요. 내 귀엔 들리지 않지만, 입속으로 끝없이 기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요. 움직이지 않는 혀와 말라버린 목구멍으로, 울며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또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도 같이 기도해야겠다고요. 지금까지 기도하고 감사했듯이, 앞으로도 감사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 고통 앞에 끝까지 겸손하고 감사했듯이, 나도 그러하겠습니다. 


당신이 남긴 글을 이제부터 찾아 읽으려 합니다.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끝까지 펜으로 글을 썼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잊힌다는 것은 정말로 죽는 것이니까요.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니까요. 부디 당신은, 당신을 사랑했던 후배들의 바람처럼, 두려움 없이 훨훨 날으시길. 당신의 손녀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아이라고 고백했던 소녀의 소망처럼, 그곳에서도 생일날 한번에 촛불을 끄시길.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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