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고고한 ‘학’과 불같은 ‘물소’/김영민
동지는 대의가 푯대요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면 동무는 차이가 만드는 긴장의 관계
병약하나 견고한 이덕무, 칼날눈썹의 당찬 박제가 다정한 듯 서늘하게 길없는 길을 갔다
한겨레
» 김영민/전주 한일대학교 교수·철학
[관련기사]
동무와 연인/③ 이덕무와 박제가

잡된 글쓰기의 개척자인 이덕무(1741~1793)의 짧은 에세이 ‘나를 알아주는 벗(知己之友)’은 동무의 그윽한 멋을 뽐낸 기념비적 명문이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뽀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권정원 옮김)

대의(大義)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擧事)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부차적이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웃는 표정만으로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가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지는 무시간적 관계인데, ‘같은 뜻(同志)’은 원리상 시간을 초월해서 동아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차가 좋고 묵은 술이 좋다고 하듯이, 친구는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다. 그것은 시간이 보존해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그래서 친구의 관계가 정실에 치우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동무는 동무(同無)!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 아래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 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짐멜(G. Simmel)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동무의 예시로서 청장관 이덕무-초정 박제가(1750~1805) 등의 이른바 백탑파 지식인들의 관계는 그런대로 적절해 보인다. 담헌 홍대용(1731~1783)과 연암 박지원(1737~1805)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이른바 북학파의 선비들이 유달리 교우도(交友道)를 강조한 것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었다. 무릇 동무란 부모의 집에서 벗어나려는 사춘기적 영웅숭배에 그 연원을 두는 법이다. 아이가 부모를 벗어나는 방식은 프로이트나 라이히(W. Reich)의 말처럼 성적 성숙만으로 읽어낼 수 없다. 동무와 결탁해서 아버지의 법과 어머니의 애착을 벗어나는 일탈 역시 성숙의 주요한 계기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교우를 굳이 이 틀 속에 넣어 보자면, 담헌과 연암으로 대표되는 당대 최고의 아웃사이더 지식인들이야말로 인정투쟁의 대상인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개신유학적 체계(왕)와의 창의적 불화 과정에서 영웅/스승을 본뜨고, 동무를 사귀고, 외부(청나라)에 눈을 돌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다.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유득공 등은 서얼 출신이라는 계급적 한계에 떠밀려 동무로서의 상호인정과 우의가 더욱 두터웠다. 명문세가 출신인 담헌이나 연암 역시 서얼의 존재구속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 등을 통해 그 혁파를 주장하면서 후학들의 입지를 돕는다. 부르디외의 유명한 말처럼 취향이 계급의 문제일 수 있지만, 계급이 취향을 아우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이덕무와 박제가는 그 대조적인 기질과 성향 탓에 동학(同學)이자 지기의 인연을 나누면서도 자잘한 긴장과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박제가는 열정적이며 당찬 성격으로 얼핏 무인(武人)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얼굴을 ‘물소 이마에 칼날같은 눈썹’이라 묘사할 정도였다. 박제가는 이덕무의 외모를 두고, “신체는 허약하나 정신이 견고함은 지키는 바가 내부에 있기 때문이요, 외모는 냉랭하나 마음은 따뜻하니 몸가짐이 독실하기 때문”(안대회 옮김)이라고 했으니, 병약하고 고고한 암혈숙덕지사(巖穴宿德之士)의 풍모였던 듯하다.

이덕무가 아홉 살 아래의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는 사형(師兄)으로서의 애정이 은근하면서도 서늘하다. <북학의>(1778)의 저자인 박제가는 중국어 공용론을 주창할 만큼 급진적 북학론자였고, 당시의 경화사족(京華士族)간에 유행했던 중국의 소설류를 무척 즐겼다. 스승 연암이 탁출하게 예시했지만, 소설적 서사는 근대적 계몽과 해방의 기법으로도 쓸모가 많은데, 볼테르와 디드로 등에서 보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정신문화적 근대화의 맥락 속에서 철학소설의 기틀이 짜인 시대이기도 하다. 루카치나 머독(Iris Murdoch)의 지적처럼 근(현)대는 정녕 소설의 시대인 것.

그러나 박학한 실학자이면서도 정통 유학자의 틀 속에서 온건했던 이덕무는 초정과 달리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연의소설(演義小說)류를 싫어했다. 소설은 귀신이나 꿈과 같은 헛것을 내세우며 천한 것을 고취하고 경전을 등한시하는 등, 마음을 훼손하는 미혹된 것이라고 매도한다. 그는 초정의 와병도 나쁜 책을 읽는 탓이고, 그와 더불어 <논어>를 강독하면 병조차 물러갈 것이라고 훈계한다.

18세기 말, 연암의 물가에서 학(鶴)과 물소가 노닐었다. 무심한 듯 곰살갑고, 다정한 듯 서늘하다.

김영민/전주 한일대학교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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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9-0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동무는 동무(同無)!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 아래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 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짐멜(G. Simmel)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친구'마저 굶주리는 시대는 아닌가요? 격이 없다는 그 감정이 살아있는 관계마저 세상의 혼탁함에 휩쓸려 점점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살아지는' 세상살이는 글쓴이가 말하듯 '동지''동무'란 말을 더욱 낯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주변의 지인과 관계를 헛갈려하고 혼동되어 제대로 된 표현을 쓰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친한 지인들과 삶을 공유하고 나누는 관계를  '가까운 친구'들이란 식으로 남에게 이야기하던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낫고 함께 공유하였으면 하는 것을 두고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섞갈리었던 것 같군요.

 글쓴이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느끼면서도, '동무'라는 표현이 맘 속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글 가운데 용어가 품고 있는 까다로움때문입니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음' '끊임없는 무게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머무르지 않고 제 색깔을 갖춰야 하는' 등등 요건들로 선뜻 몸은 내켜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한번 되돌아봅니다. 남에게 '동무'가 되고 있는가?  세상살이를 회피하거나 돌아가거나 떠밀려가는 것은 아닌지? 그냥 부담없는 친구로만 남기만 바라려는 욕심만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달라지고 변해가는 모습들을 못잡아내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제대로 하지 못해, '동무'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무'들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힘들고 부담스러워 손쉽게 '친구'들만 자리하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란 주제넘은 생각까지 말입니다.

 '동무'란 말엔 '동지'와 달리 일상성이 담겨있겠죠.  서로들 '동무'에 굶주린 세상은 없을까요? 세파에 떠밀어 살아남을 궁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뜻만 잔뜩담아 일상은 없고 '동지'만 요구하고 모으려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이야기 하는 긴장-공유-차이-일상이 녹아 있는, 사람들 관계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글쓴이의 뜻을 왜곡하면 '동지'에 중독되거나 '친구'의 관계만을 원하거나 ..... 주제넘고 정도를 넘어선 생각을 해봅니다.


해콩 2006-09-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일정 부분 이념도?)을 '공유'하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관계가 동무일까요? 함께-同하되 구속되거나 거리낄 것이 없는-無 관계. 하여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고 늘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이제껏 생각해본 적 없는 인간관계입니다. 알게 모르게 인간관계를 친구/동지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은...

同無... 고민해보아야 할 화두가 될 듯 합니다.

여울 2006-09-0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일정 부분 이념도?)을 '공유'하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관계가 동무일까요? 함께-同하되 구속되거나 거리낄 것이 없는-無 관계. 하여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고 늘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이제껏 생각해본 적 없는 인간관계입니다. 알게 모르게 인간관계를 친구/동지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은...

同無... 고민해보아야 할 화두가 될 듯 합니다.

 돋아나는 생각으로 몇가지 더 남깁니다제가 맘담고 있는 묵은 생각 가운데 하나는 '사람'과 '관계'입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을까? 사람과 맺는 '관계'나 '사회'와 대응하는 그런 '관계', '삶'이 꼭 지금과 같을까?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개떵 생각입니다.

 학자가 아니니 학문적으로 파고들 재량도, 여유도 있는 것도 아니고, 관여하는 것은 제 능력과 범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주워듣고, 생각을 자극하는 편린들 속에 어렴풋하나마 무수한 경험과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생각이겠지요.

'인생 뭐있어. 잼있게 살다가면 되지~' 그나저나 살다가면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지지고 볶고 살아가기엔 뭔가 손해보는 느낌이 드네요. 시대를 잘못 태어났나요. 나라를 잘못 태어났나요?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동시대인으로(헉, 야기가 점점 커지는군요. 쯧~) 자본주의 시대의 한자락에 태어나 쓴물만 보고 겪고 사는 것은 아닌지하는 열패감때문입니다.

그리이스-로마 사람은 어떠했는지? 중세사람들은 그 인식틀에 갇혀 나름대로 행복했는지?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어떠하였는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렇게 남의 일에 무관심한 것인지? 경제인이란 코드로 그 대화주제만 득실거리는 것인지? 이렇게 야비하게 잡아먹으려는 관계가 정상적인 것인지?란 일상의 관계.

행복하지 않은 사람. 점점 더 행복해지지 않는 사람. 넘치는 재화, 넘치는 먹거리.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였을 것 같습니다. 지구상의 다양한 삶과 방법을 들이대는 것은 동시대인으로 별로 약효가 없을 듯합니다. 저명한 학자들의 표현을 차용하여, 윤리적인 인간관, 예술-문화인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저의 소관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단지 다르게 살고, 관계맺고, 나누고 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일상으로 가져올 때, 그것의 누적분이 삶에 있어 전혀 다른 길로 가져오기에 캄캄해져 버린다고 여깁니다. 노예제도란 토대로 먹는 걱정-생활할 걱정에서 자유로웠던 나라. 그로인해 오히려 공적영역에 무관심하면 왕따를 당했던 시대.  자의식이란 개념보다 공적 개념에 익숙해, 자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는 것이 큰 의미를 부여해 그렇지 못한 것에 왕따를 당하는 윤리의식들.

신이라는 테두리에 삶 전체를 드리웠지만, 뭔가 색다른 맛이 있었을 시대의 관계맺기. 사회와 관계.

품다보니 샛길로 들어선 것 같군요.

세상탓만 하니 비루해지기는 것만 같습니다. 자기 고민하기에도 벅차고, 실존의 영역을 벗어나기도 벅차거나, 먹고 살기도 버거운데 무슨 소리냐는 핀잔을 들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면에선 관계맺기가 야만의 시대와  손익의 노예가 된 정신의 야만의 시대까지 범벅이 되어있는 듯 싶습니다.

자본의 시대의 그늘엔 올바른 관계맺기가 제대로 되지 않겠지요? 오히려 '돈'문제가 사람을 쉽게 맺어줍니다. 꾼 사람, 빌려준 사람, 남기려는 사람, 갚아주어야 하는 사람끼리 더욱 잘 만날 수 있고 맺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고를 단순화시켜, 다들 먹고 살만하다면, 평생 1억이면 품위유지도 되고 입에 풀칠할 수 있다면, 큰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다, 제대로 돌아가다, 지구상에 흘러흘러 들어 굳이 '돈'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먹고 살 게 된다면(넘, 이상적이죠. 상상하는 것은 자유이니 넘 구박마세요. 일단 갑니다.) 어찌저찌해서 몇백년 뒤에 생각도 크고, 시스템에 제정신을 차린다면 굳이 '돈'으로 관계맺어지는 것을 바랄까요? '돈'때문에 아양을 떨고 만족을 시켜야 된다면... ...

웰빙찾고, 취미찾고, 자기 일하고 싶고  그러다보면.(이것 역시 과다합니다. 상상은 자유이니 이해해주십사.)

삶을 다른 식으로 관계맺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노는 것도 그렇고.... 농사짓기도 그렇구....사람에 부대끼지 않은다면 그래도 '사람'아닐까요?  무궁무진한 속재미, 삶의 보고.

예술-문화인에 앞서 '돈'을 '사람'이나 '관계'로 환치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에 환치되어 세상의 일상이 다시 자리를 찾아간다면... ... 예술弱-문弱과 '사람과 관계맺기'(동무)弱, '돈'없음이 괄시의 지표가 되는 현실, 제대로 살지 않음의 지표가 된다면... ... 인류가 생각하지 말아야할 금기일까요? 역시 주제넘은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죄송... ...

 

 


해콩 2006-09-0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댓글... 암담하여라~ ^^;
열심히 읽어볼게요.
집중 시간이 영 짧아놔서 걱정이 좀 됩니다만..
그런데 이 긴 글을 한 호흡으로 쓰신 거예요? 우와~ @.@